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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Dec 31. 2021

[단편] 찾다

어느 유약한 존재에 관한 이야기

"거기에 없어?" 수화기 너머로 그가 말했다. "어디?" 나는 반문하며 그가 설명한 곳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하지만 빨간색 뚜껑의 작은 유리병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거기 있었는데. 지금 보는 데가 세 번째 칸 맞지?" 나는 힘없이 주저 앉았다. 거실에 있는 유일한 찬장. 세 번째 칸. 혹시나 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칸도 훑어보았지만, 없다. "정말 아침에 본 거 맞아?" 이번에는 나의 의심이 그를 향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하다니까."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 달리기 시합 직전에 운동화가 그랬고, 중학교 3학년 갑자기 비가 쏟아지던 날엔 언제나 사물함에 놓여 있던 우산이, 모처럼 마음먹고 공부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땐 OMR 카드를 마킹할 컴퓨터 사인펜이 그랬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나... 내가 가장 필요한 순간을 하나 하나 어떻게 알고 그렇게 감쪽 같이 감추나.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푹 내리쉬는 한숨은 저 높은 하늘에 단 1%도 가닿지 않았다. 

"알겠어. 다른 데도 좀 더 찾아보고 연락할게." 힘없이 끊어버린 전화에 메시지가 울렸다. [다시 한 번 잘 살펴봐. 그래도 없으면 이따가 퇴근하고 가서 금방 찾아줄게.] 다정한 문자였지만 이상하게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울컥했다. 나는 왜 그깟 작은 유리병 하나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걸까. 언제부터 그랬나. 내가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온 걸까.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순간이 오면 그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쓸 데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자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그깟 유리병 하나 원래 없던 셈 치지 뭐. 

무언가를 찾는 것. 내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 무언가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 순간 매우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 더불어 지금까지 그것은 나에게 그다지 '쓸모 없던 존재'였다는 이야기다. 쓸모 없던 존재를 쓸모 있게 만들려는 순간, 나는 그것을 찾는다.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 간절하게. 하지만 그 고귀한 순간을 수많은 것들은 보기 좋게 거부해왔다. 마치 '난 너에게 쓸모 있지 않아도 돼'라는 비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럼 나는 곧 머쓱해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 미안." 

몇 시간이 지나자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문을 열면 그가 들어와 나는 온종일 결코 찾을 수 없던 빨간색 뚜껑의 작은 유리병을 찾아내 "이것 봐. 여기 있잖아."라며 아무렇지 않게 건네겠지. 나를 찾아온 그를 수많은 존재로부터 거부당한 나는 결코 거부할 수 없다. 그가 나를 찾는 순간 난 언제나 그곳에 있고 그는 너무나도 쉽게 나를 발견한다. 그는 한순간에 나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 작은 유리병처럼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감춘채 나는 문을 열며 "왔어?"라고 태연하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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