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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2

개같은 순간 뒤 김치부침개

가족환상곡 *4

언제부턴가 잔병치레가 잦아지더니 결국 체력이 고갈되었다.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안 되었다. 온갖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쉽게 지치고 무기력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덜컥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은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마침 아파트 게시판에 부착된 피트니스 센터 광고가 떠올랐다. 얼른 등록 해야겠다는 조바심에 부리나케 동네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간단한 상담 후 곧장 등록을 하였다. 사실 이곳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줌바 댄스 때문이다. 


“3개월 등록할게요.”

안내데스크 직원이 1년 회원권을 권유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목에 힘을 주며 호기롭게 3개월을 말했다. 직원은 그런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빨리 줌바 댄스를 추고 싶을 뿐이었다. 


일단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몸을 풀었다. 줌바 수업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왠지 모를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간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입장. 쭈뼛거리며 GX룸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거울이었다. 맨 뒷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잠시 후 몸집만 한 스피커 양쪽에서 익숙한 90년대 가요가 흘러나왔다. 아는 노래의 힘인가. 멋모를 자신감을 등에 업고 강렬한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리드미컬한 고갯짓도 곁들였다. 무아지경에 빠진 와중에 강사님의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줌바 댄스가 이렇게나 격렬한 운동이라니. 나는 속으로 '엑설런트'를 외치며 매우 흡족해하였다.  


앞자리는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꿰차고 있었다. 어쩐지 끈끈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그들은 오랜 회원인 듯 어려운 동작도 척척 해냈다. 나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내 움직임은 남들보다 한 박자씩 느렸다. 춤생춤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잘하고 싶은 의욕에 두 팔과 두 다리를 쫙쫙 뻗었건만 그럴수록 줌바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강사님은 잘 보이지도 않고, 내 모습조차 아예 보이지 않았다. 거울이 있어봤자 무용지물이었다. 다음 시간엔 제일 먼저 와서 맨 앞줄 가운데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번째 수업 날, GX룸 문이 열리자마자 앞쪽으로 냅다 뛰어갔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앞자리에 크게 욕심이 없는 듯 대부분 뒤쪽에 여유로이 자리를 잡았다. 살짝 창피했지만 쪽팔림은 잠시 뿐. GX룸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오직 줌바 댄스를 위한 육신만이 존재할 뿐. 열정에 얼큰하게 취해 콧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 가운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멀뚱히 서 있다가 핸드폰과 수건을 자리에 내려두고 잠시 물을 마시러 나갔다. 지금부터 등장할 주요 인물인 아주머니 둘을 편의상 'A' 'B'로 지칭하겠다. A와 B는 줌바 댄스 앞자리 회원이다. 


다시 GX룸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이없는 장면이 눈앞에 목격됐다. A가 내 자리의 핸드폰과 수건을 저만치 구석으로 갖다 놓는 것이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A 앞에 섰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의 물음에 움찔한 A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이 자리 주인 따로 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이게 말로만 듣던 텃세인가 싶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먼저 오는 게 임자지.”

"그냥 다른 데 가서 해. 여기 자리 주인 있다니까."

A의 밑도 끝도 없는 뻔뻔함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자꾸 반말이지? A와 언쟁을 벌이는 가운데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구 자리라고 이름표를 붙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억지를 부려요?"

이대로 물러나기는 싫었다. 


“너 그 자리에서 할 거니?”

누군가 내게 대뜸 쏘아붙였다. 아마도 A가 말한 자리 주인 B가 온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B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B는 A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곤 "그래, 오늘만 거기서 해"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 겪어 보는 신박한 무례함에 기가 찼다. 수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쳐 버렸다. 줌바고 뭐고 집에 가고 싶었다. 더 이상 대꾸하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던 중 강사님이 들어오고,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두 번째 수업인데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오히려 불가마에 달궈진 것처럼 가슴에 열이 올랐다. A와 B는 수업 시간 내내 나를 노려보았다. 이럴 땐 거울이 없는 게 나을 뻔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데 A가 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순간 욕설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운동할 맛도 안 나고 씻고 집에나 가야겠다 싶어 목욕탕 문을 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저 앞에 온탕 속 나란히 앉은 A와 B가 보였다. 무슨 배짱이고,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최대한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일진놀이는 집에서나 하세요."

"뭐라고?"

발끈하는 A를 B가 말렸다. 어쨌든 나는 피트니스 센터를 계속 다녀야 했고, 그러기 위해 이 구역의 미친 년이 되기로 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들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무표정한 얼굴로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나 더이상 건들지 말라고. 또 한 번 무례하게 굴면 그땐 나도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요."

콩닥거리는 마음을 숨긴 채 서서히 일어서서 두 사람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차, 알몸인 걸 잠시 잊었다...


A와 B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목욕탕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찌릿찌릿했다. 결국 씻지도 못 하고 피트니스 센터를 나섰다. 하필 폭우가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뭐가 이리도 꼬이는지 사소한 불운은 화살처럼 연속으로 날아들었다. 최악이다. 셔터가 내려진 식당 처마 밑에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뚜르륵 떨어졌다. 눈물, 콧물이 한데 뒤섞여 너절한 민낯이 청승맞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한껏 울었더니 속이 후련해지는 동시에 배가 고파졌다. 빗방울이 서서히 잦아들자 빠르게 걷다가 뛰기를 반복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침샘을 자극하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따끈한 물로 목욕을 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식탁 앞에 앉자 엄마가 김치부침개를 내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던 엄마가 버럭 급발진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년들 머리채를 확 휘어잡는 건데. 어디 남의 집 귀한 딸한테 감히..."

“아이고, 엄마가 퍽도 그랬겠다. 소심해가지곤 머리채는커녕 머리털도 못 건드렸을 걸."

"무슨! 그래도 아니다 싶음 할 말은 하지."

"아무튼 무례한 사람에겐 안 참을 거야."

"그래, 참지 마. 이제 그만 풀고 부침개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봐."

갓 부쳐 낸 뜨끈뜨끈한 김치부침개가 먹음직스러웠다.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오, 달다. 바삭하니 맛있게 잘 됐는데."

오물오물 씹을수록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감정은 참 간사하다. 세상 서럽게 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히죽거리는 꼴이라니. 그래도 이렇게나마 위안을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 


“한쪽 더 부칠까?" 

엄마의 물음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맛본 쓴맛이 하도 강렬해서인지, 김치부침개를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단맛이 느껴졌다. 엄마는 기분 풀릴 때까지 실컷 먹으라며 김치부침개를 정성껏 만들어 주었다. 그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어떻게 맨날 좋은 일만 있겠어. 하루도 쉬운 날이 없다. 별 볼 일 없는 일로 별일 있는 그런 날. 기분이 개같다가도 김치부침개 하나에 다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볼품없을지라도, 시시하게 보일지라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기꺼이 행복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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