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환상곡 *3
“딸내미, 바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우려는 찰나 아빠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물었다.
“왜? 뭐 부탁할 거 있어?"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나직이 되물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살갑게 좀 대답할걸. 아니나 다를까 곁눈질로 본 아빠의 얼굴 위로 금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집 안의 공기가 쓴 약을 삼킨 듯 텁텁하게 느껴졌다. 가시가 콕콕 박힌 말투가 이렇게 툭 튀어나올 때면 꼭 뒤돌아 후회를 한다. 다정하게 굴자 늘 다짐하건만 좀처럼 행동으로까지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게."
자칫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싶어 경련이 일만큼 입꼬리를 한껏 추켜올리며 말했다. 얼마 못 가 입 주위가 미세하게 떨렸다. 부르르 떠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아빠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제야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자기소개서」였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자기소개서에는 아빠가 살아온 날들이 짧게 요약되어 있었다.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필체에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어때? 잘 쓴 것 같아?"
아빠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아빠가 직접 쓴 거야? 어디 내려고?”
"어제 면접 본 데서 자기소개서를 컴퓨터로 보내라길래 한번 써 봤지."
뭔가 대단한 걸 해냈다는 뿌듯함에 아빠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엇다. 사실 나도 조금 놀랐다. 문방구에서 파는 이력서만 써 봤을 아빠가 젊은 사람도 어려워하는 자기소개서를 쓰다니.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한 서글픔이 훅 밀려들었다. 얼마나 많이 고치고 쓰기를 반복했을까. 혼자 끙끙대며 속앓이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종이 이력서가 익숙한 아빠 입장에서는 컴퓨터로 이력서를 넣는 게 여간 어렵고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조건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밑그림을 그렸으니 이제 그 위에 채색을 할 차례다. 그렇게 아빠는 난생처음 컴퓨터로 자기소개서를 쓰게 되었다.
아빠와 나는 주방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이번만큼은 친절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딸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판의 기능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법 순탄한 시작이었다.
"아빠, 잘 봐봐. 여기 맨 밑에 길쭉한 네모 보이지, 이건 스페이스 바라는 건데 이렇게 누르면 띄어쓰기가 되는 거야."
"그 정돈 나도 알지."
"그럼 또 아는 거 있어?"
나의 물음에 아빠는 "당연하지"라는 말과 함께 자판 위로 손을 띄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아빠의 손은 안절부절못하고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
"어딨더라, 그게..."
"뭘 찾는데?"
"이~ 엔, 티이알... 인...터?"
"인터? 아니지. 엔터! 따라해 봐. 엔터."
목을 쭉 빼고 등허리를 한껏 구부린 채 조심히 엔터키를 누르는 아빠를 보자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30년 넘게 가족들 먹여 살렸으면 이제 굽은 등 펴고 쉴 법도 한데. 호강은커녕 취업 전쟁터로 내모는 꼴이라니. 무능한 나 자신을 질타했다. 이런 나와 달리 아빠는 지금 나이에 일할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라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겉으론 의연한 척해도 속은 바싹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든 기약 없는 취업 전쟁은 영혼마저 탈탈 털어갔다. "돈 걱정 따위 하지 말고 실컷 여행이나 다녀"라는 말을 나는 아빠에게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자판을 한참 두드리던 아빠가 파리한 낯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
"딸내미, 네가 좀 해 주면 안 될까?"
"뭐를?"
"하도 앉아 있었더니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아프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안 돼. 좀만 더 힘내 봐. 이런 것도 자꾸 해 봐야 늘어. 문서 작성은 요즘 기본이야, 기본.”
"알지. 아는데 내가 이걸 무슨 수로 하루 만에 다 하냐.”
틀린 말은 아니다. 자기소개서 종이 보랴, 노트북 화면 보랴,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 두드리랴, 이제 막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아빠는 사실 단어 하나 쓰기도 바빴다. 완벽한 문서 작성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스파르타식을 고집하는가. 무 자르듯 단호한 내 대답에 아빠 역시 섭섭한 눈치였다. 너무 내몬 건 아닌지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어쭙잖은 가르침으로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한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아빠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그 틈을 놓칠세라 나는 얼른 말을 꺼냈다.
"라면 끓일까?"
시의적절한 한마디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좋지! 파 송송 썰어 넣고 계란 탁 풀어서."
어느새 라면 국물까지 후루룩 비운 아빠는 비장한 표정을 짓곤 노트북을 꼭 안은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빠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러기를 두 시간. 아무런 기척이 없어 불안한 마음에 문을 홱 열었다. 작은 좌식 책상에 엎드린 아빠가 보였다. 씩씩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부쩍 피곤했는지 입가엔 허연 침 자국이 멀겋게 피어 있었다. 그냥 내가 쓸 걸. 후회와 자책이 살갗 아래에서 요동쳤다. 아빠가 직접 타자를 쳐 자기소개서를 완성한다면 시들해진 자존감을 되찾을 거라 내심 기대했다. 함부로 단정 짓는 경솔한 행동이었다. 또 눈물이 나오려 했다. 눈물샘에 장마라도 든 건지 더 위태로워지기 전에 내 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아빠를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돌보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겠다. 울음을 꾹 참고 노트북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고심한 흔적이 스며 있는 몇 줄의 문장이 떠 있었다. 자기소개서의 일부분이었다. 가독성을 위해 띄어쓰기와 오타는 수정하였다.
안녕하세요. 긍정의 힘을 토대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진격의 노년입니다. 직업을 찾기 위해 ㅇㅇ의 문을 똑똑 두드려 봅니다. 사실 처음 써보는 자기소개서가 많이 부담스럽지만 타오르는 열정을 보여드리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어 지원해봅니다. 앞서 제 이력서를 보셨다시피 한 직장에서만 30년 넘게 근무하였습니다. 60대에 재취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게 다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늘 그랬듯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 것입니다. 언제나 저를 믿어주는 가족들의 응원 속에서 다시 한번 힘을 내보려고 합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인생에 정년은 없습니다. 제2의 인생을 ㅇㅇ와 함께 시작하고 싶습니다.
선거 유세 못지않은 호소력이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띄어쓰기도 엉망이고, 오타도 많았지만 문장들은 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다. 아빠는 밤새 그 문장들을 고치고 다듬은 끝에 드디어 자기소개서 한 편을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빠는 취업에 성공하며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합격 소식을 접한 그날 밤,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청춘의 얼굴을 한 아빠가 <울고 넘는 박달재>를 한껏 간드러지게 부르고 있었다. 삶은 점점 소멸해 간다. 그럼에도 태양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