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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2

내가 바로 해긴싸!

가족환상곡 *5

우리 가족에겐 오래된 습관이 있다. 다름 아닌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는 것이다. 뚜껑을 덮지 않고 물을 내리면 그 순간 세균과 바이러스가 높이, 멀리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좌변기 엉덩이 받침에서 무려 25m까지 올라가고, 약 90분 동안 소멸되지 않는다고 한다. 세균 수 역시 크게 차이가 난다. 물을 내릴 때 뚜껑을 닫으면 약 100만 마리, 뚜껑을 열면 약 1억 마리 세균이 검출된다고 한다. 이처럼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면 변기 뚜껑을 열고 물을 내리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변기에 뚜껑이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아뿔싸 그 변기 뚜껑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왔다. 그러다 시골살이를 정리하고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모녀 3대가 모여 산다는 게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낯선 서울 생활이 분명 외롭고 허전할 건데 과연 괜찮을까 싶었다. 녹록하지 않은 삶이 벌써 그려졌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괜한 기우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할머니는 새로운 환경에 곧잘 적응했다. 할머니가 내딛는 모든 길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구석구석을 잘도 누비고 다녔다. 한번 가본 길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치 홍길동처럼 동네 어딜 가든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씩씩하고 꼿꼿한지 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용감해보였다. 한편으로는 들장미 소녀 캔디를 닮기도 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내는 게 영락없는 캔디다. 미루어 짐작건대 우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닐까. 아님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 아무튼 할머니의 서울 생존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야, 해긴사가 뭐냐?”

저녁을 먹던 중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그게 뭐냐고 되레 물었다. 

“내가 잘 가는 옷집 있잖아. 거기 주인 여자가 나보고 해긴? 뭐라더라. 해긴싸? 아무튼 그거래."

혹시 핵인싸를 말하는 건가. 할머니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핵인싸가 뭐냐면,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인기 많은 사람. 할매 성격 최고라고 칭찬한 거야."

나는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해긴사... 해긴싸? 해긴, 해긴싸...”

할머니는 ‘핵인싸’라는 단어가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핵인싸’를 주문처럼 되뇌였다. 나이가 들어도 얼마든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걸 할머니를 보며 느꼈다. 그 사랑스러움이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눈에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 찾아오며, 평온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깔끔 떠는 나의 기준에 할머니는 한참 미달이었다. 함께 산 지 얼마 안 된 초반에는 많이 부딪혔다. 하기야 수십 년을 따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영혼의 단짝처럼 죽이 맞을 리 없었다. 안 맞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온 이상 이곳의 삶의 방식에 따라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맞춰 가는 과정은 나름 순탄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서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단, 아직 맞춰야 할 과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쳐지지 않는 한 부분이 자꾸 내 신경을 긁었다. 


“할매, 부탁인데 제발 뚜껑 좀 닫고 물 내리면 안 돼?”

“내가 또 그랬냐? 자꾸 까먹어. 으이구, 으이구.”

할머니는 본인의 머리를 콩 치며 자책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변기 뚜껑을 열고 물을 내리는 것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물론 싫은 소리를 하는 나도 괴롭다. 입도 아프다. 더군다나 상대가 할머니라니 괜한 상처를 주는 것 같아 마음도 무겁다. 위생과 청결에 강박이 있는 나여서 더더욱 변기 뚜껑에 집착을 하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나도 이런 내가 싫다. 그저 허허 껄껄하며 가볍게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막상 활짝 열려있는 변기 뚜껑을 맞닥뜨릴 때면 짜증 버튼을 누른 듯 푸념 섞인 소리가 절로 나왔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갈등에 한동안 숨 막히는 어색함이 흘렀다.


적막에 잠긴 어느 새벽, 식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쏟아지는 졸음에 까무룩 잠이 들려던 찰나 화장실 쪽에서 갑자기 쿵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화장실 문 안쪽에 쓰러져 있었다. 혼비백산한 나는 목이 터져라 “할매, 할매~!!!”를 연신 불러대며, 문을 밀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이구~ 니 아빠랑 엄마 깨겠다.”

할머니는 기진한 듯 맥없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할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이 정도로 안 죽어... 해긴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할머니 목소리에 그만 울음이 터졌다. 곧이어 엄마 아빠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살짝 벌어진 문 틈새로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며 의식을 잃지 않도록 했다. 


“엄마, 119 전화번호가 뭐지?”

이걸 질문이라고 하다니. 나의 위기 대처 능력은 빵점이었다. 119 버튼을 누르는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구급대원이 전화를 받자 엉엉 울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다행히 구급차는 금방 도착했다. 응급실로 실려 온 할머니는 밤새 수액과 진통제를 투여받고 아침이 되어서야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다행스럽게도 큰 이상은 없었다. 탈수 현상으로 인한 쇼크였다고 한다. 말짱하다며 집에 가자 고집을 부리는 할머니 얼굴이 고새 반쪽이 돼버렸다. 떼꾼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할머니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가 아니었다. 강한 척, 괜찮은 척 하는 이면에 누구보다 깊은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아마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수많은 날들을 속으로 울었으리라.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곤한 몸을 눕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들어와놓고는 "할매, 변기 뚜껑은 이제 신경 쓰지 마. 눈치 보지 말고, 그냥 핵인싸답게 살아"라며 머릿속에 떠도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놈의 변기 뚜껑이 뭐라고... 오만가지 감정이 복받쳐 애먼 변기 뚜껑에게 죄를 뒤집어씌었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 방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슬며시 문을 열어보니 까딱까딱하는 발가락이 빠끔 드러났다. 전국 노래자랑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분이 좋은 듯 출연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어쩐지 그 흥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변기 뚜껑을 열고 물을 내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미 습관이 되었다며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나야말로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할머니 방문을 열어 숨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겁이 난다. 할머니 방에 할머니가 없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올 텐데. 이별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결코 무뎌지는 법도 없다. 할머니 방에 남아 있는 냄새마저 사라지면 그때는 정말 실감이 나겠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그 사실이... 이별과 영원히 이별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렇다고 슬퍼만 하기엔 잠깐의 시간도 아깝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민화투를 치며 행복해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촥촥 내리치는 소리가 어찌나 찰지던지.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가끔 나를 찾아온다. 


친애하는 나의 할매 천여사,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지. 둘 다 멋대가리가 없다는 것. 어쩌겠어.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기왕 사는 거 오래오래 건강하게 재미나게 살자. 알았지? 사랑해. - 핵인싸의 영원한 손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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