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Oct 30. 2022

가끔 죽고 싶지만, 매일 살고 싶다

가족환상곡 *10

몇 년 전부터 하나둘 아픈 곳이 생기다 못해 급기야 멘탈이 붕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몸이 부쩍 약해지면 실패자처럼 처참한 기분이 드는 건 물론 모든 게 불안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거기다 강박증마저 갈수록 심해졌다. 


나의 강박증 증상을 대충 말해 보자면, 두세 번씩 반복 확인하는 것. 예를 들면 현관문이 잠겼는지, 창문은 닫았는지, 스위치는 껐는지, 불은 꺼졌는지 등 제대로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두세 번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교통 카드도 단말기에 두 번씩 갖다 댈 때가 있다.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슬며시 카드를 찍는다. 마치 짤막한 모노드라마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아까 찍었나 하는 식의 독백을 중얼거린다. 그러곤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자연스럽게 카드를 단말기에 갖다 댄다. 그럼 단말기에서 '이미 처리되었습니다'라는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켜 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교통 카드 습관은 어느 정도 고쳐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행동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병이다, 병' 이라는 자조 섞인 말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나다. 뭐든지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시작이 참 어렵다. 결국 해내기까지 그 과정이 고통스러워 시작하고 싶지 않다. 미루는 행동을 온갖 변명으로 합리화하고, 그 습관을 정당화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모순적인 건 막상 시작하면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내고야 만다. 집중력은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하다. 고통스럽지만 완벽하게 일을 끝냈을 때의 쾌락에 이미 중독되어 빠져나오기란 여간 쉽지 않다. 분명한 건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초반에는 의욕을 갖고 열정을 불태운다. 이 모습이 끝까지 가면 정말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부작용이 따른다. 소위 '하얗게 불태웠다'라는 말처럼 무언가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불이 꺼진 듯 에너지가 방전되는 '번아웃'이 오는 것이다. 불청객인 번아웃에 빠져 일을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걱정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건 사실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고치지를 못하니 진짜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누에고치처럼 움츠린 채로 자기 방어에만 급급했다. 더군다나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만큼의 무기력감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일상마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문가만큼이나 잘 인지하고 있다. 특히나 고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인지한다고 해서 그 병을 뚝딱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도 자기가 겪어보지 않는 한 그 고통을, 괴로움을, 숱한 감정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여러 사례를 분석하고 연구한 데이터를 기반해 이렇게 고쳐라, 저렇게 해봐라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 의지가 없다면 조언도 폴폴 날리는 먼지에 불과하다. 결국 자신만의 알을 깨고 나와 자신의 한계에 맞서 이겨내야 한다. 계속 시도하고 실패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변해가는 나를 보게 된다. 비록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쉴 만큼 쉬다가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 어찌 됐든 나아가는 행위 자체로 이미 반은 끝냈으니까. 


가끔 죽고 싶지만 매일 살고 싶다. 온갖 불행 따위가 한꺼번에 찾아올 때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것도 잘 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각자 추구하는 행복은 저마다 다르니까. 다행스럽게 익숙한 불행도 영원하지 않다. 행복은 누가 떠먹여주지 않는다. 내가 직접 떠먹야한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해야겠지. 무조건 움직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는 불행을 앞당길 뿐이라는 것을. 거기에 열 올리는 수고스러움이 너무 아깝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비교인지 모르겠다. 뭐 적당한 비교는 삶의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치자. 다만 선은 넘지 말았으면 좋겠다. 꽃길만 걸을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우리는 그 행복을 찾아야 한다. 뻔한 말이지만 그 뻔한 말이 우리를 살리기도 한다. 뻔함의 미학을 믿어보자.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불행의 요소를 하나씩 제거 중이다. 일단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어렵다. 잘 고쳐지지 않아 하루의 끝에서 꼭 후회를 하고야 만다. 그래도 후회한다는 자체로 반은 성공이라 생각한다. 어찌 됐든 내 문제를 자각하고 있으니 끊임없이 시도할 게 아닌가. 언젠가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이럴 때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꽤 도움이 된다. 


오롯이 나를 위해 살아보려고 한다. 온전한 나로 산다는 건 위로와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위로 가운데 최고는 내가 나에게 하는 위로다. 별거 없다. 거울 속 나에게 웃으며 말해준다. 모두가 아는 그 말. '괜찮아 잘 될 거야' 과거의 나를 사랑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다. 다만 미워하지는 말자. 나만은 나를 믿어야 한다. 그 용기야말로 얼마나 든든한가.


소소할지라도 나를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살아낸다. 버티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마음먹은 찰나 시커먼 절망 위로 새하얀 희망이 군데군데 내려앉았다. 



이전 09화 엄마의 탁구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