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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2

엄마의 탁구론

가족환상곡 *9

엄마는 탁구 예찬론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쉼표 따위 존재하지 않는 듯 탁구장에 꼬박꼬박 출석했다. 아마 삶이 허락하는 한 손에서 탁구채를 놓지 않을 것이다. 탁구장은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어느 날부턴가 주 5일을 꼬박 나가며 온 열정을 탁구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행여 탁구장을 못 가게 되는 날이면 엄마 얼굴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치 종이가 흐느적거리듯 종일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엄마에게 있어 탁구는 얼마 안 되는 소확행 중 하나였고, 탁구장은 낙원 그 자체였다.


엄마의 인생은 탁구를 시작하기 전후로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삶의 질이 확연히 높아졌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티비 보는 데 할애했다. 딱히 낙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별 의욕 없는 그야말로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좀처럼 티가 안 나는 집안일이 아마 엄마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으리라. 그 당시 엄마가 느꼈을 깊은 상실감을 우리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우리 엄마, 참 애썼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혼자 아등바등했을 텐데.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맙고 다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내게는 너무 과분한 엄마다. 그에 반해 나는 과대평가된 딸이다. 엄마가 좀 손해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여느 때처럼 살아가는 수밖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니까 어쩌면, 운이 따른다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라고 '대박'을 터뜨리지 말란 법은 없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머지않은 미래에 내 이름 세 글자를 긁어보기를 적극 권장한다. 


열정 더하기 열정은 방전이었다. 남 부럽지 않은 열정 부자였던 엄마는 결국 과부하가 걸려 버렸다. 역시나 주 5일은 무리였다. 적당히 하라는 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가냘픈 몸이 끝내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진작부터 전조 증상이 나타났다. 목이 쉬어 쇳소리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대로 말을 못 한 적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탁구 칠 때 기합 소리는 물론, 매일같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으니 목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허리 상태도 나빠져 때아닌 족저 근막염까지 얻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동안 탁구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어찌나 온몸으로 암울한 아우라를 내뿜던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어지간히 몸이 근질거리고 좀이 쑤셨나 보다. 엄마의 강제 요양은 얼마 못 가 중단되었다.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고집스럽게도 평소처럼 탁구장을 드나들었다. 가지 말라고 말린들 집에 붙어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놀이공원 직원처럼 양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한없이 밝아 보였다. 명랑한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에너지가 솟구쳤다. 

"탁구 얼마나 쳤어?"

"조금 밖에 안 쳤어. 난 거의 구경만 했어."

"거짓말 같은데... 그럼 탁구장은 왜 갔어? 어차피 치지도 못할 거 좀 더 쉬지."

“집에 있으면 뭐해. 티비 밖에 더 봐.”

그 말을 듣는데 왜 내가 다 속상한 건지. 순간 울컥한 나는 엄마에게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엄마 올림픽 나갈 거야? 거기가 무슨 태릉 선수촌도 아니고 뭘 그렇게 기를 쓰고 해. 그러다 다친다고 몇 번을 얘기해. 듣는 척이라도 좀 하면 안 돼?"

너무 쏘아붙였나. 엄마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아니 내 말은, 적당히 하면 좋잖아. 엄마도, 나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도무지 적당히가 안 되는 걸 어떡해..."

입을 삐죽대며 말하는 엄마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재밌어?”

“당연하지. 탁구공 주고받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스트레스가 촥 풀린다고.”


우리 모녀는 모난 말들을 탁구공 삼아 짤막한 랠리를 펼쳐 나갔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나의 잔소리 공격을 엄마는 요리조리 잘도 막아냈다. 철옹성 빗장 수비 앞에서 나는 영 맥을 못 추었다. 탁구장에서의 엄마 모습이 새삼 궁금해졌다.

“엄마는 승부욕이 과해."

“너도 한번 해 봐라, 승부욕이 생기나 안 생기나."

“알아. 나였어도 죽어라 쳤을 걸?"

"거 봐. 너도 나처럼 그런다니까."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다치면 엄마가 제일 고생이야."

“알았어. 이제 그만."

"그러다 힘 빠지면 탁구채도 손에 못 쥔다고."

“네네, 알겠습니다. 1절만 하세요.”

“진짜 알아 들은 거야?"

어째 이번에도 흘려듣는 느낌이다. 집요하게 탁구장을 다니던 엄마는 결국 족저 근막염이 다 나을 때까지 당분간 집순이로 살기로 나와 약속했다. 그러곤 제 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엄마는 탁구 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슬펐다. 더 좋고 비싼 행복도 많을 텐데, 고작 탁구 치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니. 엄마의 소확행이 왠지 지금 현실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 서글펐다. 일상에서 작은 행복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못내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뭐, 소소한 행복도 행복이니까, 라며 애써 나를 다독였다. 다음번 엄마의 행복 리스트에는 소확행뿐 아니라 대확행도 가득 업데이트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무엇이 제일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기대하는 답변은 대략 이러하다.


“행복한 게 너무 많아서 딱 하나만 고르기가 힘들어.”


어떤 형태의 행복이든 무수한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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