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색안경들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 다르다. 각자 다른 색깔의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빨간 안경을 낀 채로, 누군가는 파란 안경을 낀 채로, 또 누군가는 아무것도 끼지 않은 맨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 너무 오래 끼고 있어서, 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눈을 가졌기에, 다 함께 안경을 벗지 않는 한 우리의 세상은 같은 색일 수 없다. 안경은 부모님께 물려받았을 수도, 친구에게 받았을 수도, 아니면 눈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만들었을 수도 있다. 세상 어딘가엔 안경을 쓰지 않은 순수한 눈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당신 곁에 순수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정말 행운아다. 그저 곁에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쓴 색안경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고, 안경을 벗어 세상의 진짜 색을 볼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빨간색 안경
내가 사는 세상에는 빨간불이 자주 들어온다. 간이 콩알만 해서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우연히 일어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해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혹여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이미 예상한 일이야'할 수 있게 미리 단련시켜 두는 것이다. 내 소심한 성격은 색안경을 3D로 만들어주었는데, '내 말을 오해하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나 뭐 실수했나?' 하며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한 파장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빨간 안경은 존재감이 더욱 커지는데,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서 위험 신호를 찾아내는 것이다.
성별, 외모, 직업, 말투, 행동 등 그 사람이 알려주는 것들을 모두 위험 또는 안전을 나타내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불안한 만큼, 겁이 나는 만큼 색안경의 두께는 두꺼워졌고, 색은 짙어졌다. 광고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 심각해졌는데, 광고나 캠페인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 대중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빠르게 예견하고,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고민할 때 '이 아이디어는 논란이 없을까?',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미리 걱정했고, 그런 걱정 속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리 만무했다.
보라색 안경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 안경은 '참고 견디는 게 좋다'는 고진감래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안경이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하시고, ROTC 장교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오셨다. 좋은 모습, 강한 모습만 보이려 하셨고, 늘 절제하고, 인내하셨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절제하는 게 좋다고 수차례 말씀하셨고, 고통을 참고 견디면 더 큰 성취할 수 있다는 고진감래의 정신을 가지셨다. 자연스레 보라색 안경을 물려받게 된 나는 5살 무렾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에 커다란 혹을 메달 고도 울기보다는 꾹 참고 아빠한테 칭찬받는 강한 아이가 되었다.
나는 오늘 두 가지 색의 안경을 찾았다. 세상을 삐뚤게 바라보는 시선 안에 어떤 색의 안경들이 더 씌워져 있을지 하나씩 찾고, 벗겨내 보려 한다. 습관적으로, 무의식에 이끌려 세상을 살아가기보다는 예측되지않아 두렵고, 혼란스럽더라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부딪히며 살아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