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이 굉장히 바쁘던 시기라 내 한 몸 건사하기 바빠서 부모님에게 소홀하던 차였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음식은 먹는 족족 얹혔고,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며, 늘 긴장한 상태였기에 어깨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20년 5월 어느 날, 일 년 반 가량 함께 일하던 팀장님이 이틀 뒤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겠다며 돌연 퇴사 선언을 하셨다. 건강상의 이유라는 말에 붙잡는 시늉조차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다. 단 둘 뿐인 팀에 나만 두고 훌쩍 떠나버린 팀장님이 사무치도록 밉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병이 났을까 가엽고, 나를 이런 고난 속에 밀어 넣은 세상이 원망스럽다가,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마음속에는 아무리 흘려도 마르지 않는 눈물이 가득 차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날도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회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20년 5월 22일 아침 지하철 플랫폼이었다. 곧 전철이 도착한다는 요란한 노랫소리와 안내멘트가 들리는 동시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였다. 아빠가 몸이 안 좋아서 동네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상태가 안 좋아져서 강릉 아산병원으로 가게 되셨다고. 오빠가 내려오고 있으니 너까지 올 필요는 없고 알고만 있으라고하셨다. 엄마의 설명을 듣던 중 지하철이 도착했고, 순간 이 열차를 타야 하나 동해로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나는 출근을 선택했다. 밀린 일이 많았고, 업무를 처리할 사람은 회사에 나밖에 없었으니까. 길게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동해는 전화선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고, 일은 코앞에닥쳐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점점 나를 짓누르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은 쌓이다 못해 흘러넘치고, 마음은 불안에 휩싸였다. 물고기가 목구멍에 걸려 파닥이는 듯 심장박동이 목젖에까지 닿아 울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되지않는 일을 꾸역꾸역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빠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한참 간 멈출 수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결국 나는 아버지를 핑계로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딸바보 아버지는 죽음의 고비를 맞이한 순간에도, 나를 기어이 수렁에서 꺼내고야 말았다.
아버지의 병명은 '세균성 뇌수막염'이었다. 뇌를 감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긴 것이었다.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은 감기처럼 앓고 지나가지만, 세균성 뇌수막염은 발병 후 24시간 이내에 10명 중 1명이 사망하고 생존하더라도 5명 중 1명은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다고 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병명과 무시무시한 설명에 하늘이 노래졌다. 통화할 때, 비염 증상이 오래간다던 아버지의 말을 신경 쓰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정확히 어떤 세균에 감염되었는지 특정할 수 없었기에 주치의 판단에 따라 한 종류의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다. 투여한 항생제가 효과를 보이지 않으면, 다른 항생제로 바꿔 처음부터 다시 치료해야했기에, 운이 필요했다. 우린 쉴 새 없이 기도했다. 아빠를 살려달라고.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내려온 이후, 나는 매일 엄마를 모시고 동해에서 강릉을 오갔다. 코로나로 인해 하루 두 번 가능했던 중환자실 면회는 한 번으로 줄었고, 주보호자로 지정된 한 명만 입장 가능했다. 나는 동해에 가서도 아빠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 지하철 플랫폼에 서있던 순간으로 돌아가 자책했다. 그때 출발했어야했다고. 어쩌면 다시는 못볼지도 모른다고.. 초반에는 중환자실 입구 귀퉁이에 숨어 먼발치에서라도 아빠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의료진이 문을 닫아버리거나, 경비아저씨에게 경고를 받아 대기실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날씨로 점을 쳤다. 강릉 아산병원으로 향하는 길, 하늘이 맑고 햇살이 따스하면 왠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들떴고,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엔 그저 말없이 기도했다. 하지만 아빠의 상태는 날씨로 가늠되지 않았다. 상태는 대게 현상태를 유지하거나, 악화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의식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잃으셨고, 보름즈음엔 중환자실 내에서 폐렴균에 감염되셨다. 면역력이 너무 약해진 탓이었다. 아버지의 폐 한쪽은 가래로 가득 찼고, 격일마다 내시경으로 폐에 있는 가래를 뽑아내야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뿐이었다. 종교가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 선생님께서 가족들을 모두 중환자실로 불렀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아빠를 가까이에서 봤다. 아빠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고, 얼굴빛은 거무스름했고, 피부는 푸석했다. 분명 체격이 건장하고 배가 불뚝 나와있었는데, 어른 옷을 잘못 입은 아이처럼 환자복이 헐렁했다. 팔과 다리는 뼈와 살가죽만 남아있었고, 양팔과 다리는 침대에 묶여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산소호흡기를 떼어낼지 몰라 묶어둔 거라 했다. 처음 보는 처참한 광경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먼발치에서 숨죽여 바라보던 아빠가 눈앞에 있으니 감격스러우면서도 믿기 힘든 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권위적이고, 기세 등등하던 아빠는 어디 가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한 명이 누워있었다. 슬픔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늘 밤이 고비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목놓아 울며 아빠의 몸을 주물렀다. 엄마는 아빠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 아들 딸이 왔다고. 나도 아빠에게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간 외면했던 아빠의 일들을 내가 돕겠다고, 후회하지 않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걸했다.
아버지는 수차례의 고비를 간신히 넘겨주셨다.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가 닿은 건지, 아니면 우리 식구가 모두 모여 속삭인 그날 밤 아빠가 우리 목소리를 들은 건지, 기적적으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뇌수막염은 염증 수치가 점점 떨어졌고, 폐렴도 호전되었다. 산소호흡기를 떼어내 자가호흡을 다시 시작했고, 의식을 회복해 엄마와 스케치북에 필담을 나눌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되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5주 하고 하루가 더 지난 6월 27일 아버지는 일반병실로 옮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