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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Feb 03. 2022

컴백 홈 대디

아버지의 뇌수막염과 폐렴 완치

죽음 300미터 앞 유턴


    뇌수막염으로 중환자실에 누워계셨던 아버지가 36 만에 일반병실로 자리를 옮기셨다. 뇌수막염과 폐렴 증상이 호전된 것뿐만 아니라, 뇌수막염 환자들에게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후유증도 없었다. 의료진들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4,000분의 1 확률이었다. 수백 수천번 상상하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눈앞에 누워있는 아빠가 믿기지 않아서, 뼈가 앙상하게 남은 아빠의 팔과 다리를 한없이 주무르고, 닦아냈다.


    한 달여간의 중환자실 생활로 아빠는 온몸의 근육이 다 빠져 걷지도, 앉지도, 팔과 다리를 들지도 못했다. 엄마와 내가 교대로 병실에서 밤을 새우며 간병을 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오빠가 주말마다 내려와 간병을 도왔고, 이모부가 동해로 내려와 함께 지내며 식구들을 챙겨주셨다. 이모부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분들이 힘을 주셨다.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빠의 지인분들과 제자분들이 먼길을 달려와 함께 걱정하고, 격려해주셨다. 아빠가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또 나에게 아빠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빠


    아프기 전에 아빠는 자기주장과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장교생활을 오래  탓에 강압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평생 화실을 운영하며 제자들을 가르쳐왔기에, 가르치는 태도가 몸에 베인 사람이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소위 말하는 '꼰대'였다. 그런데, 절대 변할  같지 않던 아빠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엄마에게 '우리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랑합시다'라며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낯간지러운 말을 하기 시작했고, 가족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는 표현을  먹듯 자주 했다. 내가 알던 아빠와 180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본인 입으로 '나는 똥이다'라고 말하며 본인의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고, 완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아빠의 낯선 모습이 얼떨떨하고 어색했지만, 좋았다.


보너스 라운드


    아빠는 이번 생이 덤이라고 말했다.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 돌아왔으니 지금부터 사는 삶은 보너스라고. 그러니  감사하며 살겠다고.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끝없이 전쟁을 치르는 꿈이었는데, 너무 힘들고 지쳐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만두려는 순간, 정리하지 못한 아빠의 수많은 그림들이 떠올랐고, 덩그러니 남겨질 그림들이 마음에 걸려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남은 생을 정리를 하며 보내기로 다짐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아빠의 삶은 살면서 어질러놓은 것들을 정리하는 보너스 라운드였다.


나의 구원자 아버지


    매 순간이 기적 같았고, 감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일로 벼랑 끝에 몰려있었는데, 아빠 덕분에 도망칠  있었다. 아빠가 아니었더라면 책임감 강한  성격에, 병들면서까지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을게 뻔했다. 사랑하는 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니, 자신도 모르게 운명적으로 자기 몸을 던져 나를 구한 건가 싶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아빠는 직장을 관두고 내려와 간병에 전념하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했지만, 되려 고마운  나였다. 아빠를 살린  의사 선생님이었지만, 나를 살린  아빠였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아빠는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앞만 보며 경주마처럼 달려오던 나에게 멈출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정말 모든  멈췄다. 일도, 관계도, 그간  끓이던 수많은 고민들도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쁘게 달리면서도 불안에 휩싸여 나를 채찍질했었는데, 동해에 내려와 아빠를 간병하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방향을 잃고, 무작정 달리며 살아온 나에게 명확한 목적이 생겨서였을까? 가족이  삶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는  깨달아서인 걸까? 불안과 고민이 사그라들면서, 그저  순간이 감사했다. 인생이, 마음이 아주 단순해졌다.  

   

컴백홈 대디    


    일반병실로 옮긴 지 2주쯤 되니,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한 달 반 만에 이발도 하고, 오매불망 아빠만을 기다리던 강아지와도 재회했다. 미각이 돌아오지 않아서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는 것만 빼면 빠른 속도로 회복하시는 듯했다.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아 걸을 수 있게 될 무렵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20년 7월 18일, 아빠가 집을 떠난 지 57일 만이었다.


    우리는 일상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일들이 모두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주 촘촘하게, 매 순간 행복을 느꼈다. 문득,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가입했던 '뇌질환 환우 모임' 카페가 생각났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얻기 위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뇌수막염 환자 가족들의 글을 찾아보곤 했었다. 이제 내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사연은 기적이었기에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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