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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Feb 14. 2022

서른 살, 캥거루족으로 산다는 것

90년대생과 50년대생의 동거생활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다.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8년을 부모님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았다. 원체 독립적인 성격이기도 했고, 친구들도 곧잘 사귀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졸업 후에도 자취생활은 계속되었다. 소처럼 일해서 번 돈을 월세와 공과금으로 지불하는 그저 그런 도시의 어른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20년간 지지고 볶고, 투닥거리고, 진하게 감정싸움하며 지냈지만, 8년 만에 우리 가족은 조금 멀어져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 가진 어른이 되었고, 부모님의 인생은 내가 모르는 사이 빠르게 달력을 넘겨 겨울을 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가 조금 낯설고, 어려워진 상태에서, 우리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스물여덟 여름,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인한 동거의 시작


처음엔,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연애 초기처럼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인구밀도 터져나가는 서울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한적한 동해살이를 하다니 매 순간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시작과 중간, 끝 모두 좋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의 끝이 어디인지, 어떤 모양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을 향하는 과정 속에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는 건 당연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


1년 간은 마냥 좋았다. 보기 싫은 사람들에게 억지웃음 지어가며 가식적인 행동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고, 삼시세끼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것도,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할 필요가 없는 것도, 출퇴근길 지옥철을 경험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미술관과 펜션 운영을 도왔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면 내 가족 주머니가 채워진다는 사실이 좋았고, 일하다가 의견 차이가 있거나, 사소한 다툼이 생기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이해와 포용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늘 나의 존재보다 일과 조직이 더 우선시 되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있으니 그 어떤 것보다 서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과 감정을 존중했고, 그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건강한 환경


우리 집은 강원도 동해 산골에 있었다. '동해'하면 '바다'를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우리 집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창문을 열면 사시사철 아름다운 두타산이 보였고, 집 앞에는 계곡물이 흘렀다. 차로 20분 거리에 바다가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었고, 산은 바로 코앞이니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바다를 더 자주 갔다.) 봄에는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하며 광합성을 했고, 시간이 남는 족족 강아지들과 뛰어놀았다. 서울에서는 늘 외식 아니면 배달음식만 먹었는데, 동해에서는 샐러드와 한식 위주의 식사를 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환경이었다.

내 방에서 바라본 두타산 풍경
야외 샐러드 식사와 강아지들

젊은 일꾼의 투입


부모님 입장에서도 나의 동거는 몹시 반가운 일이었다. 일손이 부족한 성수기에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빠의 미술관 업무보조, 홍보마케팅, 영상제작 등 부려먹을 부분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 분담에 있어서도 지분이 컸다. 전에는 엄마와 아빠의 직무가 완전히 구분되어있었다. 아빠는 건물 설비의 유지보수와 미술관 업무를 담당하셨고, 엄마는 펜션 고객응대와 객실관리, 집안일을 전담하셨다. 여기서 나는 펜션 예약 관리와 마케팅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외 나머지 업무들은 보조했다. 아빠와는 객실 페인트칠과 미술관 행사 준비를 함께하고, 엄마와 객실관리, 손님 응대, 식사 준비 등을 함께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머리가 클 대로 커버린 딸을 데리고 산다는 건 부모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다르고, 또 너무 닮아서


우린 살아온 환경이 달랐고, 사고방식이 달랐고, 취향이 달랐다. 나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지 않은 편이라, 나와 여러모로 비슷하고, 깊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 지내왔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와 살아온 환경, 생활패턴, 사고방식, 관심사, 취향까지 모두 달랐다. 음악 취향, 음식 취향, TV 취향, 운동 취향 등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그래서 셋이 함께 모여있지만 다 따로 노는, 아빠는 TV를 보고, 엄마는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고, 나는 핸드폰을 하는 풍경이 자주 만들어졌다. 셋이 다 따로 패션이었다.


하지만 우린 다른만큼 또 많이 닮아있었다. 콩 심은 데 콩이 난 것이다. 아빠와 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원리원칙주의자였다.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모순적인 성격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타인이 간섭하는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자기만의 원칙은 또 굉장히 강해서 주위 사람들이 따라주길 바라는 내로남불이었다. 이러니 우리의 대화는 둘 중 한 명이 굽혀야만 종결되었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한 명이 져주거나, 한 명이 폭발해서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거나. 글을 쓰고 보니 중간에서 엄마가 아주 고생이 많다. 우리 집안의 피스메이커 어머니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습관적인 관계의 법칙


나를 가장 답답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건 우리의 관계였다. 내 나이가 열 살일 때나 지금이나, 나중에 여든이 되어서도 우리는 부모 자식 관계였다. 부모님은 늘 한결같은 태도로 본인들이 경험한 세상을 내게 가르쳐주려 했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 더 수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만, 나는 그저 존중과 응원만 받고 싶었다. 세상에 정답은 없으니, 직접 부딪혀보라고, 너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어린 시절 훈육에서 비롯된 관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8년간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왔다. 식사 메뉴부터, 하루 일과, 주말에 일어나는 시간, 식사시간 등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며 개인주의자의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는 내 맘대로 사는 게 잘 되지 않았다. TV 채널 선택권은 당연히 나에게 없었고, 메뉴 선택권도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못 드시는 아버지에게 있었다. 8년간 하나씩 만들어 온 나의 기준들을 내려놓아야 했다.


지독한 개인주의자로 살아온 내가, 마침내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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