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살이 2년 차, 펜션집 딸내미 근황
서울에서 동해로, 독립 생활에서 동거 생활로
2020년 5월 22일에 서울살이를 접고 동해로 내려왔으니, 동해살이를 시작한 지 2년 하고도 2개월이 되어간다. 2년 2개월의 시간 동안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혼자의 삶에서 함께의 삶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서 살 때에도 혼자는 아니었다. 룸메이트 언니가 있었고,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으니. 하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것과 비교해보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삶이었다. 룸메이트 언니도 나와 비슷한 개인주의 성향이었기에 함께 사는 5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서로의 삶에 맞춰가는 과정 속에 잡음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동해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떠올리기도 전에 피식하고 웃음이 터진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너무 많은 고통과 인내, 소음 수준의 잡음이 따랐다. 부모님에게 나는 아직 품 안의 아이였고, 우리는 8년간 떨어져 지내며 서로에게 많이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들이 나를 대하듯 엄마 아빠도 나의 삶을,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기 바랐지만 부모님은 나를 아빠 배 위에서 놀던 5살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한 달에 한 번 볼 때는 부딪히지 않았던 영역들이 동고동락을 하니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접촉사고를 냈다. 반려견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분리수거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 등 함께 살면서 생기는 문제도 많았지만, 펜션을 함께 운영하니 싸움이 배로 늘어났다. 사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직장 상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점이 큰 문제였다. 직장 상사였다면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닥치고 일했을 테니.
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서로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많은 싸움 끝에 타협점을 찾은 안전지대 영역도 있고, 서로 벼르고 있지만 터지면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참고 있는 비무장지대 영역도 있다. 민폐 끼치는 것도, 당하는 것도 싫어하는 개인주의자에게 영역침범이 난무하는 지금의 삶이 고통스럽지만 어쩌면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중생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주려는 계시 말이다.
비워내기, 내려놓기
동해에 오기 전 나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그래서인지 성수기보다 비수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성수기에는 몸이 부서질 듯 힘들지만 마음은 편안한 반면, 비수기에는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나를 덮쳐와 몸도 마음도 무너졌다. 친구들은 다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와 같은 물음표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죽을 만큼 바쁜 성수기와 죽을 만큼 지루한 비수기를 4번쯤 반복하니 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성수기에 비수기를 그리워하고, 비수기에 성수기를 그리워하는 짓을 그만둔 것이다. 방법은 단순했다. 스스로에게 자주 되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불안해도 괜찮아', '이런 삶도 있는 거야'라고. 남들과 다른 나의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내가 이제야 조금씩 나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보편적이지 않은 삶도 괜찮다고. 과반수가 달리고 있는 궤도 밖에 있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나는 자꾸 부족한 점을 찾고, 불만족한 부분에 집중했다. 그러고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고, 애를 쓰다 안되면 불평하고 탓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소중하고 감사한 것들 투성이다. 남은 평생 동안 부모님과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살 날이 얼마나 있겠으며, 빽빽한 빌딩 숲이 아닌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 산다는 건 또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지난 2년간 아빠에게서 텃밭 가꾸는 방법을 배웠고, 엄마에게는 꽃밭 가꾸는 방법을 배웠다. 자연을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었고, 자연과 함께 뛰어놀던 부모님의 삶도 엿볼 수 있었다. 동해에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을 경험들이다. 글로 적으며 돌이켜보니 지나가는 순간이 문득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진다. 지금의 마음 그대로, 매일을 살아가야지. 동해를 만끽하며, 지금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