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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Feb 20. 2022

뭐라구요 아버지? 똥이 되겠다구요?

아빠의 똥 변태기

아빠는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우리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나는 똥이다.”


권위적이고, 명예를 중요시했던 아빠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처음에는 "엥? 아빠가 왜 똥이야?" 했지만, 같은 발언을 서른마흔다섯 번쯤 들으니 이제는 잘 안다. 그 말속에는 '고집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며 살겠다.' '너희들이 다 옳다.' '그동안 미안했고 고마웠다.' '앞으로 노력할 테니 잘 좀 부탁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음을.


아빠는 평생 그래 왔듯, 마음먹자마자 곧장 실천에 옮기셨다. 명령조와 훈계조의 말투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좋아요~"를 외치셨다. 고개를 치켜들며 하이톤으로 외치는 좋아요였다. 식사 전에, 또는 식사 후에, 바다를 볼 때, 산책을 갈 때, 지인이 찾아올 때 등등 시도 때도 없이 외쳤다. 평소엔 당연하던 것들이 아프고 나니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에 감사해했다. 아빠를 따라 온 가족이 "좋아요"를 외치고 나면, 정말 모든 게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주위가 덩달아 행복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냥 똥이 아니라 향기 나는 똥이 되시려는 걸까? 아니면 될성부른 똥의 기운이 주변 대지의 기운을 좋게 만든 걸까? 여하튼 아빠의 변화는 가정에 평화를 가져오는 듯했다.


또 아빠는 똥 선언 이후, 수직적이고, 강압적이었던 태도를 수평적이고, 순종적인 태도로 바꾸었다. 원래 아빠는 일의 효율성을 중요시해서 빠르게, 독단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선결 정, 후통보, 불통의 대명사였던 아빠가 이제는 우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심지어는 "네~" "좋아요~" 나긋하게 대답한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옳은 말이어도 남의 말에는 반박부터 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던 사람이었는데 '맨스 플레인'에서 '맨'만 남았다. 그냥 맨이 아니라 무려 젠틀맨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똥으로 거듭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음식이 똥이 되려면 식도, 위, 소장, 대장 여러 기관을 거쳐야 하듯, 여러 개의 관문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던 에고를 깨뜨리고, 수시로 올라오는 분노를 삼키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나의 틀림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완전히 틀렸다. 네가 옳다. 주문을 외워야 했다.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똥이 있었다면 똥이 되는 일은 보다 훨씬 수월했을 터였다. 귤 박스 바닥의 상한 귤 하나가 박스 전체를 곰팡이로 뒤덮듯 똥의 기운도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모두 날것의 무언가였다. 각자의 기준이 너무나 뚜렷하고 선명해서 섞이지 못하고 부딪혔다. 똥이 되겠다는 선언과 다짐은 아빠 혼자 했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가 똥이 되어야 완성이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식구니까.


'똥 선언' 이후 일 년 반 동안 참 많은 충돌이 있었다. 세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었고, 타고난 성향 자체가 달라서 부딪히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똥이었다면, 서로에게 내가 틀리고 네가 옳다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했겠지만, 우리는 내가 옳으니 네가 맞추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나에게도 8년간 혼자 살며 터득한 나만의 살림법, 가치관, 생활방식이 있었다. 환경문제에 민감한 내가 추구하던 원칙들은 부모님이 고수하던 분리수거 방식과 부딪혔고, 인터넷으로 반려동물과 관련된 다양한 상식들과 사례들을 접하며 살아온 나는 부모님이 강아지들을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우리는 모두 옳은 길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상식이 너무 달랐을 뿐이다. 살아온 시대가, 보고 자란 환경이 너무 다르니 당연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똥이 되어야 했다.


아직도 우리는 똥이 되지 못했다. 아직 위장 또는 십이지장 어디쯤 머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반의 기간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쪼개기와 삼키기, 소화의 과정을 거쳤고, 많이 변했다. 다음 글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똥 변태기를 담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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