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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Mar 01. 2022

분리수거 영역다툼

90년대생과 50년대생의 동거생활

90년대생 딸과 50년대생 부모의 동거생활에는 정말 많은 트러블이 있었다. '뉴노멀'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엄마 아빠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나의 상식이 너무 달랐다. '원래 다들 그렇게 해'라는 관용구를 우리 사이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살며 가장 많이 부딪혔던 부분은 바로 분리수거 문제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환경문제에 유난스러웠다. 텀블러는 필수품이었고, 비닐봉지는 무조건 재활용, 포장은 다회용기에 해야 마음이 편했다. 반면에 부모님은 환경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각성을 많이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도, 인터넷으로 환경오염에 대해 자주 접하며 자라온 나에 비해, 정보 노출이 적었기 때문일 테다.


분리수거, 불필요한 수고?


지역특성상, 우리 동네는 근처 시멘트 공장에서 일반쓰레기를 수거해간다. 시멘트를 만드는 정에서 쓰레기를 태워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빠는 분리수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플라스틱이든, 캔이든, 불 속으로 들어가 재로 사라질 텐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아니.. 플라스틱 타면서 발생하는 유해물질 어쩔 거야.. 분기별로 주민들 모여서 분리수거는 왜 해 그럼.. 시멘트공장에서도 태울 수 있는 일반쓰레기만 버려달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리들이 웅성거렸다. 아빠는 당당했고, 나는 당황했다.


십 년 가까이 자취를 했던 나에겐 여러 원칙들이 있었다. 각자 자신만의 모닝루틴, 공부법, 목욕 순서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나만의 분리수거 원칙들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원칙들은 자꾸 무너졌다. 나 혼자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도, 돌아서면 뒤죽박죽이었고, 무엇보다도 나의 분리수거 습관들을 부모님이 못마땅해했기 때문이다. 페트병 라벨지를 떼거나 박스에서 테이프를 뜯고 있으면, 왜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함께 사는 동거인들이 싫어하면 안 할 법도 한데,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내가 꾸준히 지속한다면, 나의 습관들이 부모님에게도 야금야금 스며들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계란 껍데기는 음식물쓰레기가 아니라 일반쓰레기야. 동물이 먹을 수가 없어"

"이 박스는 비닐로 코팅되어서 분리수거가 안돼, 일반쓰레기야"

"우리 같이 플로깅 할까?"  (*플로깅 : 조깅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것)


어리석은 나는 부모님을 변화시키려 애썼다. 내가 옳고, 부모님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몰라서 안 할 뿐, 알려주면 분리수거를 잘할 거라 생각하며, 나의 원칙을 강요했다.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서로 묵인하고, 눈감아주던 작은 균열은 부딪히는 순간마다 벌어졌고, 급기야 쪼개질 지경까지 다다랐다. 


그날 아빠는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를 하고 계셨고, 나는 먼저 식사를 마친 뒤 포카리스웨트 라벨을 떼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아빠가 버럭 소리를 치셨다. 


“괜히 사람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말고, 분리수거할 거면 안 보이는데서 해!!”


벙찐 나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는데 버퍼링이 걸렸다. 반주로 막걸리를 걸쳐서 말 대신 막걸리를 내뱉으신 건가? 나는 그저 습관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안 보이는데서 하라고 하니 내 존재가 눈에 거슬린다는 말처럼 들려서 서러웠다. 누가 죄책감 느끼라고 했어? 내 마음대로 분리수거도 못하고 살아야 해? 이 집에 살려면 아빠의 법을 따라야 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 아빠는 똥이라고 말해놓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뱉지는 못했지만, 속에서 아빠의 한마디로 그간 내 안에 억눌려있던 불만들이 폭주했다.


아빠의 막걸리 발언을 시작으로 우린 그간 참아왔던 속마음을 언성 높여 터뜨렸다. 아빠는 유난스러운 내 행동들이 너무 불편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엄마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자리에 있지도 않은 엄마를 데려와 2대 1 구도를 만들다니, 나는 분해서 씨익거렸다. 내 편에서 함께 싸울 90년대생이 필요했지만, 우리 집에는 50년대생 두 명뿐이었다. 외롭고 분했다.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분리수거를 왜 해야 하는지,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빠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다음 세대를 위해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아빠는 미래에 그에 맞는 기술이 개발될 테니 쓸데없이 걱정 말라고 했다. 창의적으로 내 복장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레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아주 그냥 심통이 잔뜩 나있었고, 아빠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도 그날의 대화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날 대화에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합일점을 찾지 못했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싸움이 필요한 이유였다.


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아빠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펜션 객실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얼마나 방대한지, 그것들을 완벽하게 분리수거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깨달은 것이다. 보아하니 내 원칙대로 분리수거를 계속했다가는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살아야 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원칙을 수정했다. 일반쓰레기, 플라스틱/캔, 병, 종이 네 가지 분류로 분리수거하되, 플라스틱에 붙은 비닐 따위는 눈감아주는 걸로. 그렇게 나는 약간의 융통성을 얻었다.


나의 변화에 비해 아빠의 변화는 드라마틱했다.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동거생활 2년 차에 접어든 지금, 아빠는 스스로 박스를 접고, 페트병 라벨지를 떼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심지어 함께 장을 보러 나가면, 새 봉지를 꺼내는 아주머니를 제지하며, 내가 챙겨간 비닐봉지를 대신 건넨다. 그렇게 우리는 1년 반 만에 서로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혼자가 익숙한,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에서, 함께가 익숙하고, 다름이 두렵지 않은, 아주 조~금 융통성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90년대생과 50년대생, 우리 사이 세대차이는 그렇게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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