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직유 Mar 02. 2022

인생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의 이유, '자유'를 찾아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지난 일주일간 관찰해보았다.


 아마도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관찰해 본 결과, 일주일 간 나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고, 입이 즐거운 식사를 하고, 달콤한 말을 찾아 듣고, 위험한 바깥세상 대신 안전한 이불속에 머물렀다. 오감의 만족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니 이게 바로 행복을 위한 삶 아닌가? 다만, 유통기한이 아주 짧고, 장기 복용 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인스턴트 행복이라는 단점이 있다. 건강한 행복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건 분명해보였다.


 당장은 즐겁지만, 지나고 나면 후회감으로 더부룩한 인스턴트 행복. 후회할 걸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인생을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에, 여유가 생겼을 때 버틸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생활에서는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 퇴근 후엔 오롯이 욕구 충족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움직였다. 큰 만족엔, 큰 리스크가 따랐기에 최소한의 에너지로, 적당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들만 선택했다. 자극적인 배달 음식, 자기 전 침대에서 하는 핸드폰이 대표적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도, 금전적인 여유가 생겨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에도 나는 금세 불안해졌다. 이 여유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인스턴트 행복을 찾았다. '내일 야근하게 될지도 몰라. 쉴 수 있을 때 미리 쉬어두자', '또 언제 쪼들릴지 몰라, 돈 있을 때 맛있는 거 먹어두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불행에 대비해서 비축하듯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행복을 위해 사는 동시에, 고통을 위해 살고 있었다. 


 고통받기 위해 존재하는 삶이었기에,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고, 코앞의 작은 행복만 좇느라 진정한 행복은 찾을 수 없었다. 무의식 깊숙이 뿌리 박힌 관념과 몸에 배어버린 습관에는 관성의 법칙이 더욱더 강하게 작용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 쳇바퀴 같은 삶을 계속 살아야 하나?',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거 아닌가?' 같은 질문이 튀어나오더라도,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기보다, 늘 하던 대로 멍청한 상태가 되어 인터넷 기사를 보거나 유튜브를 봤다. 익숙한 방향으로, 길이 든 방향으로 생각이, 행동이 흘러가는 것이다. 


'인생은 고생'이라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어떻게 생겨났길래 이렇게 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걸까? 어려서부터 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같은 관용구의 영향인 걸까? 고생은 좋은 거라고, 고생을 해야만 낙이 찾아오는 거라고 나도 모르게 세뇌된 걸 지도 모르겠다. 젊은 나이에 고생하지 않으면 늙어서 더 고생할 거고, 고생이 없으면 낙이 찾아오지 않을 거란 두려움에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왔나 보다. 내가 스스로 세운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는 모양인지, 고통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싸움을 걸더라도 문제를 만들었다. 그래야만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젠 인생관을 바꾸고, 무의식적으로 인스턴트 행복을 찾는 대신,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인생은 고생이다'라는 이상한 믿음 대신,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로 인생관을 바꿔보려 한다. 카르페디엠 '인생을 즐겨라'로 인생관을 잡기엔, 솔직히 어떻게 즐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왠지 내 인생이 쾌락 속으로 타락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삶에 통제권을 갖는 방향으로 인생관을 재설정해보았다. 나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습관과 고정관념을 모두 내던져버리고, 의식이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된다면 내 인생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까? 타인과 관계 맺기가 보다 수월해질까? 직업적인 성취가 생길까?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와 사회가 물려준 기준과 가치가 아닌, 진정한 나의 가치와 기준으로 살게 되는 날 자유가 시작될 거라 믿는다. 


  언젠가 자기의 이유를 찾아 자유의 몸이 된다면, 나처럼 고통 속을 헤매는 이들을 찾아 도와주고 싶다. 지금의 방황과 고민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운이 난다. 늘 쫓기듯 바쁘게 살아왔지만, 내가 쫓던 길 끝엔 늘 타인의 욕구 내지 사회의 기대가 달려있었고, 그래서 노력 끝에 성취를 얻더라도 기쁘기보다는 공허했다. 지금까지 바닥을 모르는 깊은 물속에 잠겨 부유하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한줄기 햇빛을 찾아 헤엄쳐 올라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찰나의 행복을 누리며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나의 이유를 찾아, 자유 속에서 살고자 한다.


신영복 - '담론'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