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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Apr 10. 2022

추락위험, 기대(하)지 마시오

창조성을 갉아먹는 방해꾼을 처단하라 - 지령 1

우리는 모두 내면에 창의적인 예술가를 한 명씩 데리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 예술가와 혼연일체가 되어 창조적으로 살고, 누군가는 자신 안에 예술가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내 안의 예술가는 무엇 때문에 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지금부터 내 안의 방해꾼들을 찾고, 처단해보겠다.


추락위험, 기대(하)지 마시오


나는 창조적으로 살 수 있는 좋은 떡잎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화가였고, 유치원생일 때부터 어머니는 미술학원을 운영하셨다. 내 DNA에는 아버지의 창의적인 유전자가 흘렀고, 미술학원은 창의성과 미적인 감각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실제로 사회화가 덜 된 5살 무렵의 나는 꽤나 창조적이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었으며, 미술대회에서 큰 상을 수상해 거액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타인의 존재를 의식한 순간부터, 나의 창조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네 아빠 화가라며? 너도 그림 잘 그리겠다!"

"너네 엄마 미술학원 한다며? 그럼 맨날 그림 그려? 그림 디게 잘 그리겠다!"


화가 부모님을 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친구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고, 멋있어했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의 이런 관심을 꽤나 즐겼다. 하지만 자랑스럽고 으쓱하는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들의 기대가 부담감과 압박감으로 변해 더 오래, 더 강하게 내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나의 창조적인 삶을 훼방 놓는 첫 번째 방해꾼은 '기대'란 놈이었다.


학교에서 포스터를 그리는 날이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위 친구들의 그림을 훔쳐봤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색이 화가 딸인데, 허접하게 그리는 건 용납이 안 되고, 잘 그리고 싶다는 중압감에 생각 상자는 더욱 굳게 닫혔다. 옆자리 친구들의 도화지가 채워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져 결국은 그럴듯해 보이는 친구들의 그림을 하나씩 베꼈다. 베끼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백지를 내는 것보다는 덜했다. 사생대회날에는 더 과감했다. 내 그림은 미술학원 선생님에게 맡겨버리고, 다른 친구들의 그림을 도와주었다. 현실의 내가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지키는 게 중요했다.


'화가의 딸'이라는 기대는 친구들이 던졌지만,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건 나였다. 한 가지 기대를 만족시키면, 또 다른 기대, 더 어렵고 난해한 기대가 생겨났다. 한 번 붙은 기대는 끊임없이 자가 증식했고, 불어나는 기대들에 부응하려면 쉴 새 없이 나를 굴려야 했다. 이리저리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굴러다니다 보면, 어느새 '나'는 깊숙이 파묻혀버리고, '남들의 기대'들만 덕지덕지 붙어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있었다. 남들이 던져놓은 기대들을 이고 지고 살고 있으니 창조성은 개뿔. 압사되어 땅 속으로 파묻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부모님의 기대, 주위 어른들의 기대, 선생님의 기대, 친구들의 기대. 사람들의 기대는 분명 나를 하늘 높이 붕 띄웠다. 하지만 그 기대의 높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몸집을 불려야 했고, 눈덩이로 된 가짜 몸은 작은 돌멩이만 마주쳐도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새롭고, 재미있어 보이는 길 대신 안전한 길, 남들이 걸어본 길을 선택했다. 어떤 모험도 하지 않는 재미없고, 지루한 삶의 시작이었다.


나에게 어떤 기대가 기대어져 있는지 살펴보자. 차근차근 한 꺼풀씩 벗겨내다 보면, 깊숙이 파묻힌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의 모닝 페이지가 나의 허물들을 벗겨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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