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을 갉아먹는 방해꾼을 처단하라 - 지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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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기 비관적 자아 생성 코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가짜로 몸집만 잔뜩 불린 채 으스대는 아이를 좋아할 친구는 없었다. 친구들의 기대에 기대어 가짜를 연기하며 살았지만, 결국엔 모두 들통나고야 말았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모두 등을 돌리면서, 현실로 추락한 것이다. 마주하기 힘든 민낯이었다. 하필 그 당시에는 친구들이 많고, 잘 나가야 한다는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던 터라 무려 열 명 남짓한 아이들과 대적해야 했다. 은근하고, 교묘하게 시작된 따돌림은 점점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공부하는 척한다고,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면 똑똑한 척한다고 시비를 걸었다. 나의 모든 행동은 놀림거리,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무언가를 하기 전, 스스로를 검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남들을 모두 깔보고 무시해온 안하무인 독재자였고, 그들 자신은 불만들을 참고 있다가 봉기를 일으킨 독립투사들이었다. 탄핵당한 독재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수돗가에서, 옥상에서, 운동장에서 나의 지난 과오들을 마주해야 했다. 거친 욕설과 함께 말이다. 대체로 레퍼토리는 비슷했는데, 학교에서 거슬렸던 사건들을 짚고 넘어가는 걸로 시작해서 외모나 인격을 조롱하는 욕설들로 마무리지어졌다. 그들 또한 '일진'이라는 기대에 열심히 부응하는 덩어리들에 불과했기에, 썩 창의적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너는 인성이 글러먹었어."
"제발 나대지 좀 마"
"누가 널 좋아하겠냐?"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런 말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나대지 마'라는 말은, 수차례 들었을 게 분명하다. 한국 여성이라면 '나댄다'는 이유로 한 번쯤은 욕을 먹거나, 해봤을 테니 말이다. 저 말들은 비롯한 조롱과 멸시, 비난의 말들은 끈질긴 생존력으로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두 번째 방해꾼은 왕따를 당하며 생긴 '비관적 자아'다. 이 자아는 나를 주눅 들게 만들고, 비난하며, 멍청한 선택을 하도록 종용한다.
많은 학습 이론가들이 주장하듯, 반복학습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저 잘난 맛에 살던 열두 살 소녀를 단 몇 개월 만에 패배감과 무력감, 비관주의에 쩌든 루저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설득력은 충분하다. 성격이 너무 낙천적이라 고민인가? 진지함이 없어 걱정인가? 평소 주변인들에게 눈치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가? 초단기 비관주의 자아 생성 코스를 추천한다. 잔뜩 신나 있는 아이를 주눅 들게 만들고, 사방팔방 탐험하기 좋아하는 아이를 영원히 한 자리에만 머물게 만들 수 있다.
비관적 자아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수학여행 장기자랑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나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이성들을 모조리 밀어냈다. 미대에 들어갔지만 그림은 그리지 않았고, 영화 연출을 전공했지만,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다. 어떠한 다짐을 하는 순간에도 '네가 그걸 한다고? 정말 할 수 있겠어?'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순간에는 '그럼 그렇지'라는 경멸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성취감보다는 패배감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러버린 비관적 자아와의 이별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비관적 자아를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반복학습만이 답이다. 꾸준히, 반복적으로, 다양한 상황에 응용하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말을 들려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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