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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Apr 21. 2022

완벽하기 위해 도망친 완벽주의자

창조성을 갉아먹는 방해꾼을 처단하라 - 지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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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소개했던 나의 창조성을 갉아먹는 방해꾼들은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하는 마음'과 '비관적인 자아'였다. 이번에 소개할 녀석은 '완벽주의'다. 


    중학생 무렵, 어머니가 미술학원 운영을 그만두면서 정말로 그림과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그림은 쳐다도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자격지심이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해본 적 없으면서 도망쳤다. 하지만 삶은 끊임없이 나에게 창조적인 삶을 살라고 속삭였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에게 부모님과 선생님이 미대 입시를 제안했고, 못 이기는 척 다시 미술과 재회한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일방적으로 잠수 이별해놓고, 해명도, 사과도 없이 불쑥 찾아갔는데, 관계가 좋아질 리 만무했다. 심지어 찾아간 이유가 그림을 정말 좋아해서, 내 마음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해서 따위의 실리적인 이유라니, 최악이었다.


    심지어 입시미술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즐기고,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의 수단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입시를 위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그림 연습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법칙에 따라 그리고 평가를 받아야 했다. 손이 느린 나는 늘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고, 과감하게 색을 올려야 하는 단계에서도 소심한 터치만 반복했다. 매일 평가를 받아야 했고, 내 그림은 매일같이 가루가 되게 털렸다. 평가 시간이 다가오면 심장이 쪼그라들었고, 도망치고 싶어 졌다. '화가 딸'에 부합하는 이상과 그림을 못 그리는 현실 사이 괴리감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평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림의 재능이 없다는 확신만 강해질 뿐이었다.


    특히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최하점을 받고, "뭘 그린 게 있어야 평가를 하지"라는 평을 들었을 때는 너무 수치스러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그림에 최하점이 표시되는 순간마다,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림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게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존을 위협받는 수치스러운 상황이 연속되니 멀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림은 나를 창피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고의 기간을 견디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결말은 새드 앤딩이었다. 실기 없이 성적만으로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합격했으니 해피앤딩 아니냐고? 모두들 부러워하고, 축하해줬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림에 대한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극복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치심 현장의 가해자와 목격자들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영영 붓을 다시 잡지 못했다.


    미대에 가서도, 나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시도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비겁한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창조에 대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 창조 욕구를 기선 제압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해 영화를 공부했고, 시나리오를 쓰지 못해서 짧은 글을 쓰는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지금은 광고에서도 도망쳐 부모님의 펜션사업을 돕고 있다. 여러 분야를 전전하는 동안 성취의 순간, 인정받는 순간도 꽤 있었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늘 마음 한구석엔 스스로를 비겁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평생 동안 창의적인 삶의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창조적인 삶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방황했는지도 모르겠다.


    원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100%의 확률로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마음이 촉촉해질 때 까지 끊임없이 도전하는 방법뿐이다. 도망을 멈추고, 직면해야한다. 분명히 직면의 순간은 올 테고, 만족스러운 순간이 늘어나면서 생긴 성취감과 자신감은 과거의 수치심을 상쇄시켜 줄 것이다. 30년을 도망치며 살았지만, 앞으로 남은 평생 창조적으로 산다면, 나의 인생은 창조적인 인생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앞선 30년 동안의 회피, 미완성, 수치심, 패배감, 열등감 등은 남은 생의 창조적인 활동으로 덮일 것이다. 창조적인 삶으로 귀결되는 삶이기에, 앞선 방황이 더욱 값지게 여겨질 것이다.



    이로써 나는 내 창조성을 방해하는 방해꾼 셋을 검거했다. 첫째는 타인들의 '기대', 둘째는 '비관적 자아', 셋째는 '완벽주의'다. 방해꾼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니, 잘 달래서 보내줄 차례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방해꾼들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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