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콤플렉스
우리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러 아이들이 살고 있다. 순수하고, 해맑은 마음을 가진 아이도 있을 것이고, 겁에 질린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 그 아이들은 작고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고, 또 꽁꽁 잘 숨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무지 변덕스럽기 때문에 비위를 맞추려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이다. 우리가 살아오며 마음으로 낳은 아이들이다. 그러므로 책임감을 갖고 잘 보살필 의무가 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내는 현대인들에게 내면 아이를 돌보라는 말은 무리한 요구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앞가림도 못해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아이를 돌보라고?
심지어 실제 하지도 않는 마음속 아이를?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뒤처지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매 순간 존버 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속 아이를 돌보라니 왠 헛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우리들의 내면에 아이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들의 몸은 성인이지만, 그 몸을 조종하고 있는 건 우리의 아이들이다.
나에게도 여러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아이답게 늘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눈치 없이 끼어들기 일수고, 관심을 주지 않으면 돌발행동을 저질러버리곤 한다. 엉뚱한 상황에서 눈물을 터뜨려버린다던지, 종로에 가서 뺨을 때리는 식으로 말이다. 이 안에서도 서열이 나뉘는데, 가장 힘이 세고, 서열이 높은 아이는 '착한 아이'다. 녀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아이'나 '떼쓰는 아이'는 그 앞에서 맥을 못 춘다. 어쩌다 나의 아이들은 착한 아이에게 지배당하게 된 걸까?
나의 부모님은 또래 친구들의 부모님보다 열 살 가량 더 많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띠동갑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띠동갑, 아빠와 오빠가 띠동갑이었다. 요즘은 서른이 넘어 아이를 낳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른 중반의 출산이라니 당시 출산 트렌드와 맞지 않게 아주 늦은 노산이었다. 이 사실은 늘 걱정을 입에 달고 사는 친할머니에게 새로운 걱정을 안겨주었다. 마흔이 가까이 된 아들의 때늦은 육아가 염려된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자식을 고생을 덜고자 나에게 자주 말했다.
"아빠 엄마가 나이가 많으니까 말 잘 들어라. 힘들게 하면 안 된다."
많은 이들은 늦둥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겠다며 부러워했지만, 늦둥이에게도 남모를 고충이 있다. 또래 친구들보다 부모님과 함께 살 날이 적은 것과 어려서부터 부모 봉양의 부담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늙었다는 사실은 내 마음속에 불안의 싹을 틔웠고, 그 불안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꿈으로 반영되었다. 부모님에게 못되게 굴면, 나는 어김없이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대성통곡하는 악몽을 꾸는 것이다. 악몽에서 깬 어린 소녀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다짐할 뿐이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엄마 아빠 말 잘 들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있다고 했는가? 아니다. 후회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에 부모님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고,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나는 늘 '을'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선택들은 심플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선택이 덜 후회될지 고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효녀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어린아이는 살아계신 부모님을 자꾸만 죽였다. 상상 속에서 죽이고 또 죽이며 미리 후회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반성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착한 아이가 독재자가 될만하지 않은가? 다른 아이들은 이미 착한 아이에게 세뇌되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꼼짝 마!'라는 착한 아이의 명령에 나머지 아이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굴복할 뿐이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오빠는 똘망똘망 쌍꺼풀이 짙은 커다란 눈과 귀여운 외모 가졌을 뿐만 아니라, 걸음마를 뗄 무렵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비상한 머리를 타고났다. 하지만 나는 쌍꺼풀이 없는 쭉 찢어진 눈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대형 코 평수를 가진 못난 이었다. 오빠는 어딜 가나 '인형 같다, 아역 모델시켜라'라는 말을 들은 반면, 나는 늘 이 말을 들어야 했다.
"아이고 장군감이네~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오빠를 보면 자연스럽게 감탄했고, 나를 보면 멈칫 하거리며 귀엽다고 하거나, 껄껄 웃으며 장군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처받았다고 울면 분위기를 망칠 거라는 사실을. 그럼 부모님은 난처해할 테고, 그 모습을 보는 나는 후회할게 분명했다. 어린 내가 떠올린 최선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미소를 짓는 거였다. 나의 어린아이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아빠는 언젠가부터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세상에서 예쁜 딸'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친구들이 어떤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러고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내 딸 예쁘지?"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나를 보며 예쁘다고 말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던 나는 비참했다. 아빠 친구들에게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보다 아빠가 내 눈치를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 칭찬을 종용하는 순간이 훨씬 더 비참했다. 아빠의 속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빠가 나를 못생겼다고 여기고 있어서 저렇게 행동하는걸 수도 있다고, 상처받은 어린 나는 그렇게 여겨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아빠의 생각과 의도를 헤아리는 일에는 능통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나를 위한 일이라고, 결과적으로 나는 상처를 받았지만, 의도가 좋으니 그만이라고 말이다.
오빠와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부모님의 관심과 애정은 한정적이고, 오빠와 나는 둘이었기에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명석한 두뇌로 엄마의 관심을 옭아매고 있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공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오빠는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나는 그 점이 정말 너무나 부러웠다. 엄마는 오빠에게서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에게 실수를 반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러웠다. 원체 시기 질투가 많고, 손해 보는 꼴을 못 보는 아이였으니 더 그러했다.
나의 지금 이때까지 나는 오빠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나는 늘 오빠의 손바닥 위에서 오빠의 전술에 따라 움직이곤 했다. 참으로 얄미운 오빠였다. 오빠는 초등학생 때 전교 1등을 했고, 중고등학생 때에도 늘 전교권에서 놀던 우등생이었다. 반면 나는 노력하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던 열등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공부로 오빠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다른 방법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쟁취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다. 심부름을 잘하고, 말을 잘 듣고, 눈치를 보는 착한 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직도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그동안 나의 내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 탓이다. 나의 행동이 오롯이 나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은 탓이다. 내 속의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 탓이다. 나는 나의 어린아이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다. 오래 걸리더라도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내 안의 모든 아이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들,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들을 글로 옮겨 적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