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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Apr 28. 2021

나를 배신하지 않는 확실한 행복

나의 행복한 순간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한지 안다는 것은 내가 언제든 행복을 찾아 느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파도를 잠재우는 행복을 처방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상황, 환경, 행동 등을 최대한 다양하게, 많이 찾아 두는 게 좋다. 언제 어떻게 덮쳐올지 모르는 우울과 불행에 맞서 나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행복의 순간들을 몇 가지 소개해보고자 한다. 나의 행복 버튼이 누군가에게도 작동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나는 눈송이 같은 사람이다. 따뜻함을 만나면 금세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노곤한 몸을 뜨끈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 밀어 넣으면, 몸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몸이 녹아내리는 그 순간,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물리적인 따뜻함 뿐 아니라, 따뜻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도 나는 금세 녹아내린다. 나를 향한 따뜻함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향한 온기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어김없이 녹아내린다. 또 나는 물에도 녹아버린다. 물에 몸을 맡겨 둥둥 떠다니고 있으면 그곳이 곧 천국이다. 물에도 녹고 따뜻함에도 녹는데, 따뜻한 물에는 얼마나 빠르게 녹겠는가? 반신욕은 내 마음속 눈송이들이 쌓이고 엉겨 붙어 얼음덩어리가 되더라도 금세 녹여버리는 힘을 가졌다.


  나는 붕 뜬 시간을 좋아한다.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 출퇴근 시간. 비행기 타고 이동하는 시간 같은 붕 뜬 시간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어지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만으로 채워도 되는 시간이라서 나는 그 시간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나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자유 시간이 생겨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붕 뜬 시간은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주기 때문에 나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잠을 청해도 괜찮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좋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도 좋고, 글을 써도 좋다. 붕 뜬 시간에 하는 모든 행동은 결과에 상관없이 긍정의 피드백을 받는다. 자신에게 야박한 내가 그 시간만큼은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난 붕 뜬 시간이 참 좋다.


  홀로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은 나를 온전하게 만든다. 자연 속에 있으면, 양질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자연 속에 있으면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 할 수 있다. 방 안에서도 홀로 나를 마주할 수 있지만, 자연 속에 있으면 내 몸의 감각들을 더욱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 들어오는 숲의 향기, 지저귀는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 손끝을 스치는 바람, 자유롭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나의 오감을 깨워준다. 내 몸의 감각들이 살아나는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고민과 잡념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에 머물게 된다. 내 존재에 대한 질문도,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불안도 순간 사라진다. 세상에 자연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오묘하고 신기한 시간이 나는 참 좋다.


  파도치는 바다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세상에 똑같은 파도는 없다. 한참을 바라보고있어도 멀리서 시작되는 파도의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개성 있다. 얕은 높이로 달려와 희미하게 부서지는 파도도 있고, 집채같은 몸집으로 바위를 집어삼키는 파도도 있다. 파도의 생김새는 다 다르지만, 모두 멋지다. 얕은 파도라고 해서 볼품없지 않고, 바위를 집어삼킨다고 해서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파도를 한참 간 바라보며 나는 위로받는다. 제각기 다른 생김새로, 다른 힘을 가진 채,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가지만, 결국은 함께 어우러지는 파도. 마음이 복잡하거나 자존감이 낮아지는 순간, 가만히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이며, 나와 다른 이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을 거라는 위로와 희망을 얻는다.


  그동안 나는 내 안이 아닌 밖에 점을 찍고, 내가 가지지 못한 점들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살아왔다. 내 밖의 수많은 점들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고, 또 초라하게 만들었다. 몸집을 커 보이게 하려고 몸에 바람을 넣는 복어처럼, 조금이라도 커 보이기 위해 채워 넣기 급급한 삶을 살았다.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채우려 노력하면 할수록, 가지지 못한 점들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고, 내 안은 깨진 항아리처럼 늘 공허했다. 내 안에 점을 찍고, 내 목소리를 듣고, 나에게 집중하니 그제야 조금씩 내 안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행복해 보여 따라 해보아도, 결코 나에겐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행복은 맞춤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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