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창의력이 부족하다.
혹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적인 사고패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큰일 날 거야.
워라밸과 높은 연봉을 받지 못하는 건 실패한 삶이야.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모두들 나를 무시할 거야.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구는 망할 거야.
우리 강아지들은 실외에서 지내니까 불행할 거야.
늦잠 자고 게으르게 살다니, 나는 망할 거야.
나는 대체로 내 안에 답을 정해놓고, 그 답안지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불안했고 불행했다. 내 안의 정답들을 따르며 살았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존재였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커졌고, 나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 위해 애쓰는 대신에, 현재의 내 모습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또한 불행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참고 데리고 사는 일이었으니.
서울살이를 접고 동해로 온 지 2년 반이 되었다. 2년 반동안 나는 스스로를 가여워했다. 동해에서의 삶이 성공과 거리가 먼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해의 삶은 지금껏 내가 꿈꿔 온 성공의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보았던 커리어우먼의 삶을 동경했다. 멋진 차를 타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모습을 선망했다. 하지만 동해에서의 삶은 정 반대였다. 숲 속에 둘러싸여 매일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삼시세끼 밥 차려먹고, 강아지들 산책시키고, 부모님과 차 한잔 마시고 나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있었다. 일 년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만족감은 불안함으로 변했다. 여유롭고 평화로웠지만, 창조적인 삶, 비전 있는 삶처럼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해의 삶을 유지할 것인지, 서울의 삶으로 돌아갈 것인지 계속 고민했다. 동해의 삶은 평화롭고 여유롭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았기에 자유롭지 못했고, 경험을 확장시킬만한 인프라와 또래집단이 부족했다. 반면 서울에서의 삶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이었지만, 삶이 너무 고단했다. 늘 번아웃 상태였고, 마음이 공허했다. 고민을 마음에 품고 장단점을 따져가며 고민했지만,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동해의 삶이 불만족스럽거나,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엔 서울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지만, 풍경을 감상할 때나, 여유롭게 책방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동해살이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정을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또 탐탁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나에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무료한 동해살이와 치열한 서울살이 외에도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동해에서도 펜션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서울에서도 전처럼 치열하지 않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동해를 떠난다면 과거처럼 번아웃을 겪으며 살게 분명하고, 동해에서 사는 삶은 창의적이거나 발전적일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성공은 곧 고통의 인내라고 생각했고,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창의적인 삶을 살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틀에 박힌 생각 속에 갇혀있었다. 나의 불행이 나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후련했다.
성공 = 서울, 고통, 번아웃
성공 ≠ 재미있고 평온한 삶
한번 알아차리고 나니, 유사한 사고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다가도 '아.. 이거구나?' 하고 알아차리곤 했다. 우리들의 삶에는 A 뿐만 아니라 B부터 Z까지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다만 나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아니면 더 좋은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A만 붙잡고 아등바등 애썼을 뿐이다. 생각하기를 귀찮아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선택지를 고르고, 그걸 정답이라고 여겼다. 내가 쓴 답안과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망한 거라고 생각하던 융통성 없는 답정너가 바로 나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길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 길을 만들어라. 고가도로, 지하도로를 만들 수도 있고, 터널을 뚫어 산을 지날 수도, 해저터널을 만들어 바다를 건널 수도 있다. 꼭 자동차로만 가야 하는가? 아니다. 하늘길을 열어 비행기나 헬리콥터, 어쩌면 로켓이나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도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선택지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낙천적인 태도로, 내 안에 답이 있다고 믿고 찾는다면 분명히 길은 있다.
중요한 건, 머리가 아닌 끌림을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머리는 내가 아닌 사회의 것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끌림을 좇아가자. 일단 좇기 시작하면, 길은 열리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