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죄송합니다 13편

아직도... 트라우마

by 전안나 작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13편.

아직도 트라우마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그리스어 어원이라고 한다.


트라우마는 인간을 꿰뚫고, 인간은 트라우마로 꿰뚫린다. 나는 어릴 때 과보호와 학대를 넘나드는 훈육 속에서 극과 극을 달리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아동학대와 입양이라는 트라우마로 꿰뚫린다. 그 두 단어 앞에서는 머리가 잘린 삼손처럼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다.

내 마음속에 반사회적인 욕구와 공격적 성향이 한 번씩 올라온다. 혼란스러웠다. 나란 인간은 사회 속에 수용되지 못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상상 속에서 무의식과 자아가 싸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성향은 나의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아동학대 피해자에게 보이는 학대 피해의 결과였다.


체벌과 관련된 50년 치 데이터를 메타 분석한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는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보이게 될 경향이 높다"라고 한다. 때때로 내 속에 반사회적 욕구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되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 내 모습이 절망적이고 수치스럽다.


가장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말처럼, 나는 꼭 내 안에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씻어버리고 원래 타고난 나의 기질 그 자체를 찾고, 점차 균형 잡힌 생을 살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배움에서 알 수 없었던, 내가 엄마가 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아이들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준다. 내가 엄마라는 이유로 내가 못생겨도, 원하는 것을 다 못해줘도, 내가 무엇을 하든 엄마 프리미엄을 나에게 얹어준다. 아이로부터의 무조건적 환대, 그 황홀함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내 존재 자체로의 수용이었다.

아이를 낳고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아이를 때리지 않고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때리는 것은 훈육이 아니라 처벌이다. 아이도 어른처럼 말로 이해시킬 수 있고 좋은 관계를 맺으면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이를 낳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를 학대했던 양어머니이다. 어떻게 자신보다 체구도 작고 약한 아이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릴 수가 있지? 아이를 낳고 보니 더욱더 이해할 없다



아동학대는 특정 이상한 가족, 이상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아이를 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타인에게는 하지 않았을 언어적 비언어적 폭력을 남발하는 사람이 바로 ’ 엄마‘ 아빠’이고,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장소가 바로 ’ 가정‘이다.


흔히 하는 등짝 스매싱, 아이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뺏는 것,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 아이에게 욕 하는 것, 부부가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을 아이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 모두 방임, 신체적 학대, 언어적 학대, 정서적 학대에 속한다는 것을 부모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매를 든 사람의 논리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랑이다.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은 범죄인데, 왜 아동폭력은 사랑의 매인 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매를 든 사람의 논리이다.


체벌 덕분에 내가 바르게 자란 것이 아니다. ‘체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렇게 나의 트라우마는 나를 아동청소년 담당 사회복지사로, 아동인권 강사, 부모교육 강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괜찮냐고?


아니, 아마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는 내 몸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고,

나는 끊임없이 트라우마와 싸우며 살다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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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는 이것으로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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