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된장통을 열어보니
된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된장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 잠시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제 남은 이 된장마저 먹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어떡하나.....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바닥을 보이는 된장통을 보니
갑자기 서글펐다.
해마다 간장, 된장을 어머님께 받아서 먹던 내가 과연 '장 담그기'를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담근 적이 없기에 이제부터는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장 담는 것을 배우거나 아니면, 맛 좋은 시판 된장을 찾아내야 한다.
그날 저녁, 어머님의 마지막 된장으로 끓인 찌개는 다른 날보다 맛있어서 남편은 바닥까지 싹싹 긁어 밥을 비벼 먹었다.
이게 마지막 된장이야.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된장 사 먹어야겠네.
그래야 할거 같아.....
며칠 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우리가 잘 아는 브랜드의 '재래식 집된장'을 사 왔다. 포장지에 붙어 있는 된장찌개 그림이 맛있어 보였고 국산콩으로 만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열심히 된장찌개를 끓였으나 우리가 그리던 집된장의 맛이 아니었다.
사놓은 것을 안 먹을 수는 없고 어찌어찌 먹기 시작했으나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저절로 된장찌개 대신 다른 국물 요리를 자주 하게 되었다. 미역국, 북엇국, 김치찌개, 시래깃국..... 등
그러다 보니 된장찌개가 다시 먹고 싶어 져서 이번에는 집에서 좀 멀리 있는 농협 하나로마트에 갔다.
우리 지역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는 된장이 있었다. 농협에서 파는 것이라 그런지 나는 좀 더 재래식 된장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값도 꽤 나갔다. 비싼 만큼 맛있겠지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역시 긴장된 마음으로 정성껏 끓였다.
먹어보니 된장인데 청국장 맛이 났다. 맛있는 듯, 이게 아닌 듯싶은 맛.
마지막으로 쿠*에서 재래식 된장을 검색했다. 구입 후기가 가장 많고 별이 4개 반 정도인 상품으로 골라 주문을 했다. 이번에는 맛있겠지, 스스로 최면을 걸며 구입한 된장도 우리 입맛에는 맞지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솜씨에 익숙한 식구들의 입맛을 시판된장으로는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나.
남편과 함께 직접 장을 담거나 아니면 우리의 입맛을 바꿀 수밖에.
귀차니스트인 우리 부부는 입맛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입맛을 바꾼 것이 아니라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여 먹지 않았다.
우스운 것은 외식하러 가서는 집된장의 맛이 아님에도 된장찌개를 맛있게 잘 먹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다가 아파트 근처 호수 공원을 산책하던 중 집된장 파는 곳을 알게 되었다. 살고 있는 집에서 10년을 넘게 시간을 보내면서 호수 공원을 산책했지만 집된장 파는 곳에 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큰 옹기와 단지들이 즐비한 흙마당 한쪽 가에 '집된장 있습니다'는 간판이 서 있었다.
집된장 맛이나 한 번 보자 싶어 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볕 좋은 휴일 오후라 주인이 어디를 갔나? 아님 낮잠이라도 주무시는가? 몇 번의 호출 끝에 몸빼 차림에 꽃무늬 티셔츠와 빨간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한 분 나오셨다. 된장 맛을 좀 보고 싶다는 우리에게 흔쾌히 장 맛을 보여주셨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1리터가 채 안 되는 투명 플라스틱 통 속에 담긴 된장을 거의 5만 원 돈을 주고 사면서 주인할머니에게 무심코 말을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된장을 사 먹어야 하네요."
"아이고, 시어머니는 아쉽지가 않고 된장이 아쉽구먼... 쯧쯧"
"...........!"
된장이 아쉬워서 어머님이 아쉬운 것인지, 혹은 어머님은 아쉽지 않지만 된장이 아쉬운 것인지 좀 헷갈린다.
다만 팩트는 어머님 솜씨의 된장은 이제 없고 다른 할머니의 된장을 사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와서 모처럼 끓인 된장은 다른 솜씨였음에도 집된장의 맛이었다.
이제부터 우리 집 된장은 호수 공원 할머니의 집된장이다. 그렇게 선언하고 나니 어쩐지 찜찜했다.
그분도 연세가 많으셨다.
내년에는 남편이랑 메주를 사서 된장을 한 번 담아보기로 했다. 그는 어머님이 장 담그는 것을 많이 봤다고 했다. 나도 몇 번을 봤으니 간수 잘 빠진 천일염을 사고 소금 농도만 잘 맞추면 얼추 괜찮은 간장과 된장이 나올 거 같았다. 문제는 귀찮음의 극복일 뿐.
결국 입맛이 전통을 지켜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