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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꽃 Dec 13. 2024

주는 사랑, 받는 마음: 엄마의 반찬(2)

10.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 투박한 비닐봉지 속에 담긴 사랑, 시어머님의 반찬


어머님이 살아생전에는, 못 가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골집을 다녀왔다. 부지런하신 어머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바리바리 싸주셨는데 그만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려도 주고 싶어 안달하셨다.

그렇게 싸주시고도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전화를 하셔서 냉장고에 있던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주었다며 아쉬워하셨던 어머님.

잔뜩 받아와서 우리 집 냉장고를 가득 채우던 그것들은 대체로 상추, 깻잎, 나물 등의 채소들과 찹쌀, 좁쌀, 콩과 같은 잡곡들, 그리고 홍시가 주를 이루었다.


시작이 가난했기에 신혼 때는 어머님이 주시는 모든 재료들이 귀하고 감사했다.

나는 어머님이 주신 재료들로 열심히 음식을 했고 열심히 먹었다.


그러나 가져오는 양이 식구 수에 비해 너무나 많았기에 먹다 보면 질리거나 상해서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머님이 시골 땡볕에서 얼마나 고생하면서 지은 것들인데 그걸 버리게 되다니...... 그럴 때면 어김없이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어머님은 언제나 완성품보다는 재료를 많이 주셨다. 

며느리인 나로서는 날이 갈수록 어머님이 주시는 성과물이 '숙제'를 내주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무 철이 되면 열무김치를 담가 먹으라며 열무를 잔뜩 주셨고, 가지 철이 되면 가지를 자루로 가져가라 하셨다. 말린 시래기를 잔뜩 넣어주셨을 때는 그걸 찜통에 넣어 서너 시간씩 삶아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어야 했다. 상추와 깻잎 손질도 게으른 나에게는 쉽지 않았고 까지 않은 마늘을 잔뜩 받아온 날에는 손톱 밑이 쓰리도록 마늘을 깠다.


너무 많아서 이웃에 나눠줄 때면 친정 식구들 생각이 나기도 했다. 시어머님이 계신 시골집과 친정은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주중에 근무하고 주말에 농사일 돕는 남편에게 처가까지 가서 농산물을 나눠주고 다시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어쩌다 남편이 내 마음을 알아채고 엄마에게 들러 쌀이라도 한 자루 드리고 오면 정말 고마운 마음이었다.


어쨌든 남편과 함께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은 언제나 힘들었다.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삼시세끼 손을 거쳐야 밥상이 차려지고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이따 해라, 야야........ 어머님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며느리가 잠시도 앉아 있는 모습을 못 보셨다.

몹시도 급한 성격에 화난 말투, 결정적으로 나와는 다르게 너무도 부지런하셨다.

세상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하나 어려울 것 없어 보였던 큰 목소리와 큰 액션.


그나마 나이가 들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말 시골집에 가는 횟수가 줄었는데, 나의 저질 체력 덕분이었다. 시골에 다녀오면 다음 날 출근이 어려울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으니 결국 남편 혼자 가는 일이 많았다. 남편은 태어나 살던 자기 집에다 자기 어머니가 거주하고 계시니 잦은 시골행이었지만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어머님이 계신 시골에 다녀오는 일이 날이 갈수록 힘들게 느껴졌다.

낯선 환경을 접했을 때 누구라도 처음은 좀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시댁은 날이 갈수록 더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시집살이'란 말이 나온 것일까.....

갈수록 남편과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일도 일이지만 사실은 시어머니의 급한 성격을 견디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좋은 감은 팔고 홍시가 된 못생긴 감들이 주르륵 우리 집으로 왔다. 신문지에 흙이 묻은 그대로 둘둘 말려 물기 없는 상추가 한 보따리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여있을 때나, 까지 않은 마늘과 무쳐 먹으라고 주시는 각종 나물들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식탁 위에 쌓여 있을 때, 시골 옆집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데 바닥에 떨어졌지만 맛은 있다고 보내주신 사과 자루를 볼 때면 나는 남편에게 짜증을 냈다.  


신문지에서 흙 묻은 상추를 꺼내 씻어 물기를 빼고 비닐에 넣는 일, 검은 점 투성이의 못생긴 홍시들을 그릇에 담는 일, 까지 않은 마늘을 언제 날 잡아 까야지 하면서 앞 베란다로 보내는 일, 나물들을 냉장고 야채 칸에 넣거나 삶아진 나물을 간장과 참기름에 무치는 일, 양파를 앞 베란다에 두기 위해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마련하는 일, 김치 냉장고에 가지며 오이를 쟁여 넣는 일......


남편과 아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깻잎 김치나 콩잎 김치조차도 반찬 통에 옮겨 담는 것이 힘스럽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시골에서 가져오는 모든 것에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친정의 큰아버지께서 시골에 사셨고 어린 시절 외가가 경북 산골이라 아궁이에 불 때고 새벽에 쇠죽을 쑤며 누에치고 과실수 농사짓는 모습을 흔하게 보아왔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였기에 잠시 손님처럼 다녀가곤 했던 시골 큰아버지 댁과 외가의 시골 생활이 어떤지를 잘 알지 못했다.

아궁이에 불 때는 것은 보았지만 직접 밥을 한 적이 없었고 상추며 깻잎, 고추를 딴 적은 있으나 씨를 뿌리고 지슴(김)을 메고 약을 쳐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엄마나 나의 부엌이 아닌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음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자라왔던 스물네 살 먹은 작은 젊은이(작은 며느리)는 결혼 후 시어머님과 윗동서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시골집 며느리가 되어갔다.


낯선 환경에서도 비교적 적응이 빠른 편이었지만 시골집 며느리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몸이 힘든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성품을 접했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는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살아오신 세월이 신난 했던 어머님께 유순함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깨닫는 것만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벚꽃이 찬란한 4월이면 남편은 주말마다 농번기라 시골에 가야 했고 단풍이 찬란한 가을이면 가을걷이로 바빠 시골에 가야 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린애를 데리고 집에 있느니 남편을 따라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꾸역꾸역 힘이 들어도 함께 갔다. 시골에 다녀오면 그곳에서 얼마나 몸과 마음이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푹 퍼져서 오로지 누워 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아무 곳에도 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지쳤었다.


경주 보문단지에 벚꽃 구경을 간 것이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무슨 이유로 그때 시골 대신 꽃구경을 갔는지 모르겠다. 처음 간 벚꽃 구경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벚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꽃구경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불국사 단풍 구경을 처음 갔다. 스물몇 살의 어느 가을날, 다니던 대학의 인문관 벤치 앞의 붉은 단풍에 반했던 이후로 그 해 불국사의 단풍은 내 나이 쉰이 넘은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단풍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후로도 한 번씩 가을이면 불국사를 갔지만 그때처럼 단풍이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

결혼하고 처음 간 꽃구경과 단풍구경에 하늘도 봐주셨나 보다고 혼자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시댁이 시골이면 농사일 돕느라 힘들긴 해도 공짜로 농산물을 얻을 수 있어 내 지갑의 돈이 굳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어머님의  사랑이니 넘치든 모자라든 간에 주시는 것을 감사히 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도 안다.


늘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하시는 분이라 뼈마디 성하신 곳이 없으셨던 분. 그렇게 편찮으신 몸이었음에도 어느 한 해 장 담그기를 거른 적이 없으셨던 분. 200 포기 배추를 절이고 씻어서 며느리와 딸이 오기를 기다리며 김장 준비를 하시던 분. 갈 때마다 보따리 보따리 한 보따리씩 가지고 계신 것을 나눠주시던 분.....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난들 왜 몰랐겠는가.

알면서도 어머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늘 생각에 잠겼다.

왜 주는 사랑에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것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고......


인어공주는 자신이 사랑한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인어의 꼬리를 버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은 뒤 두 개의 다리를 얻어 그의 곁으로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사랑하는 왕자의 곁에 머물 수 있음에 행복했다. 왕자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언젠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자신을 구해 준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을 구해 준 것은 인어공주였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왕자는 수녀원에 있던 아리따운 아가씨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웃 나라 공주와의 혼담이 오고 갔으나 관심이 없었던 왕자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 깜짝 놀란다. 알고 보니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며 잊지 못했던 그 여인이 이웃 나라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왕자의 결혼식날 밤, 슬픔에 빠져 있던 인어공주에게 언니들이 찾아와서 마녀가 준 칼을 내민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왕자의 가슴에 칼을 꽂아라. 그러면 너는 다시 인어가 되어 우리들과 함께 살 수 있다."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가 꿈속에서조차 자기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서도 차마 그를 찌르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칼을 던져버린다. 뱃전에서 왕자를 위해 기도하던 그녀는 태양이 떠오르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공기가 되어 바람을 따라 날면서, 슬픈 눈으로 인어공주를 찾는 왕자 부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을 했다며 동화는 끝이 난다.


나는 어머님이 주는 사랑의 방식이 들었지만 남편은 어머님을 사랑했다. 

그는 힘에 부쳐도 어머님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것으로 행복해했다. 그리고 나도 그와 함께 그의 편에 서길 바랐다.


조금 어머님을 사랑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기적인 것이든, 일방적인 것이든 어머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논리로 따지기 전에 남편을 사랑하듯 어머님의 마음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결심한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을 하기로.

그 상대가 나의 아들이든 남편이든 또 나의 부모님이건 상대가 원할 때 사랑을 주기로.

때로 넘치게 주고 싶지만 절제해야 하거나 아낌없이 주고 싶은 사랑을 상대가 원하지 않아 상처받고 아플지라도, 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처럼 마음 아프지 않도록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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