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일기-갑의 갑질

by 핑크솔트

경력이 단절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에서의 일이다.


당시 우리 사무실은 고객사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어떤 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던 공간을 사무실로 쓰는 형태였다.

가끔 고객사 직원들이 우리 사무실에 커피도 마시고 과자도 먹으러 오긴 했는데

어느 날 고객사의 만년대리가 근무 시간에 우리 사무실에 와서 아무 말 없이

마냥 앉아있기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만 있어서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고 각자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목소리로 내가 술 사줄까?

하고 물었다. 그때 마치 짠 것처럼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동시에 아닙니다! 를 외쳤다.


그리고 그다음 날 소장님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나를 불렀다.

- 솔트씨... 미안한데.........

- 무섭게 왜 그러세요?


알고 보니 어제 사무실에서 마냥 앉아만 있던 고객사 대리가

우리 소장님을 불러서 너네 여직원이 컴퓨터를 잘 다루는 거 같은데

하고 운을 떼더란다.

에이 잘하긴요 일하는 것만 하죠 하고 대답했는데

상대방에게서 나온 본론은 본인이 학력이 짧아 승진을 못하고 있어서

대졸학력을 만들려고 학점은행제 등록을 했다.

하지만 본인은 바쁘고 귀찮으니 너네 여직원한테 그거 수업 좀 대신 들으라고 해줘! 가

본론이었던 것이다.

본인과 같은 소속 회사 직원들한테는 그것이 부당한 지시라 차마 말을 못 하니

만만한 을인 협력사에게 떠넘길 생각을 했고 어제 사무실에 와서 앉아만 있던 것은

그 말을 하려고 오긴 왔는데 차마 못하고 괜히 술 사줄까? 했던 것이다.

그 건물에 많은 을이 입점해 있었지만 우리한테 찾아온건 당시 우리만 사무실 상주인력인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장님은 처음엔 거절했다고 했다. 에이 솔트씨 바빠요 하고 거절하려는데

그럼 너네 공사 서류 다 반려되고 싶어? 하고 묻더란다.

그리고 진짜 그날 오후 내가 내일의 공사계획서를 제출했다가 평소 같았으면

아무 문제가 안될 계획서가 가루가 되게 까이기 시작했다.

공사 서류가 반려되고 공사 일정에 못 맞추면 괴로워진다.


소장님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수업만 들어달래 시험은 본인이 보겠대 그냥 켜놓고 다른 거 하고 있어도 된대....


공사계획서가 가루가 되다 못해 먼지가 될 정도로 트집 잡힌 경험을 하고

알겠다고 대신 수업 들어주겠다 대답을 하고 다음 날 고객사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어가자 만년 대리가 나를 보고 정말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야!!!! XX(우리 회사)의 솔트씨 오면 해달라는 거 다 해줘!!!

사인도 다 해주고 다 토 달지 마!!!! 하고 외쳤다.


진급을 못해 만년 대리긴 해도 해당 현장 소장이었다.

연차는 오래됐는데 진급은 못하고 자기보다 늦게 들어온 기사들도 때가 되면

진급을 하는데 못하니 뒤늦게 대졸 학위를 따야겠다 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본인이 직접 안 하고 갑질로 해결하려는 게 어이없었다.


그렇게 나는 갑의 수업을 대신 들었다.

꼬박꼬박 성실하게 동영상을 틀어놓고 내 할 일을 했고

학점은행제 하는 곳의 플래너에게 오는 전화도 내가 꼬박꼬박 받았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전화를 한 플래너 분이

- 아 시험도 대신 보신다면서요? 리포트는 언제까지 제출하시면 됩니다.

- 네? 본인이 직접 안 하신대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객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만년 대리는 나를 보자 솔트씨!! 시험 잘 부탁합니다!!

어찌 된 거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 방에 앉아서 갑의 리포트를 대신 작성하며

심사가 매우 뒤틀렸다. 내가 이렇게 남의 과제를 하는 동안

그 사람은 가족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갑질로 이렇게 만든 학위를 가지고 떳떳할까?

양심에 한줄기 스크래치라도 있을까?

확 고객사 본사에 투서하고 나도 회사 때려치워?

...

그날 리포트를 다 쓰고 제출한 후 치맥을 하며 갑의 갑질에 한마디도

못 하는 을의 입장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다.

이러면 사실 학위는 내가 받아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시험이 끝나자 그 사람은 소장님을 통해 백화점 상품권을 내밀었다.

최대리가 솔트씨 주래..


그걸 처음엔 안 받으려고 했다. 안 받고 안 하고 싶어요 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돌아오는 건 괜한 서류들의 반려와 갖은 트집이었다.

가운데 끼어있는 소장님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그렇고

일에 차질이 생기니 버틸 수도 없었다. 결국 그걸 받고

남은 학기를 꾸역꾸역 성실하게 수업 틀어놓고 내 할 일 하고

과제 대충 써서 내고 쪽지시험도 대강대강 하고.......

근데 하필 성적은 때마다 잘 나온 모양이다. 젠장... 최선을 다해 대강 했거늘.....


그렇게 대신 수업을 듣고 시험도 보고 과제를 하는 게 반복되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나의 출산을 위한 퇴사가 임박해졌다.

퇴사한다고 인사를 하러 갔는데 그걸 알자마자 그는 나를 붙들고

과제!! 과제 좀 해주고 가요!! 외쳤다.

그 말에 슬쩍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나가는 문 앞까지 쫓아와서 제발 과제!!! 이번만 해주면 되는데!!!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상황을 모르던 고객사 직원들까지 무슨 과제? 뭔데?

하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봐서요 한마디 남기고 돌아서서 나오는 등 뒤로

정소장!!! 솔트씨 설득 좀!!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장님도 곧 퇴사를 앞둔 사람은 두려울 게 없는 상태인걸 알아서인지

조심스럽게 그거 과제만 좀.... 아니 솔트씨는 마지막이고 다신 저 사람 안 볼 거지만

우린 아니니까 좀 해주고 가면 안 될까? 미안해..


그렇게 그 사람의 마지막 과제를 해주고 퇴사를 했다.


지금이야 시간이 10년도 더 된 일이니 이렇게 얘길 하지만

갑질도 정도껏 해야지 학위는 갖고 싶고 본인이 노력하기는 싫고

그래서 을에게 떠넘겨서 받은 학위는 무슨 의미가 있지?

본인의 노력 없이 얻은 게 온전한 본인의 것일까...?


그 사람은 원하던 대로 진급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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