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일기 -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

by 핑크솔트

나는 자부할 수 있다.

이 회사 다니는 동안 여태껏 단 한 번도 사무실에서 화를 낸 적이 없다.


나 김솔트... 이 회사의 만만한 호구...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고 업무를 많이 시켜도

박박 갈려나가도 싫은 내색 절대 안 하는 그런 호구.....

근데 문제는 그거다.

싫은 소리도 안 하고 싫은 내색도 안 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있다 보니

한편에선 솔트매니저 = 천사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가마니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

퇴사한 A매니저는 내가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한 적도 있다.


며칠 전의 일을 살펴보자.

오전부터 새 사무실과 구 사무실을 오가고 월 말이라 할 일이 몰린 이 와중에 박팀장이


- 김솔트야!! 큰일 났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우리 내년 경영계획 내야 된다!!!


해서 그거까지 떠안고, 재무팀에 제출할 매출 계획도 짜고 있느라 없는 힘도 쥐어짜고 있었다.

하루에도 일하다 말고 몇번이고 일어나서 이삿짐을 챙겨야 하는 저녁밥 먹을 때마다 손이 떨리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박팀장이 회의실로 우리를 불렀다.

사무실 이전과 관련하여 구매팀에서 협력사마다 메일을 보냈으나 누락된 곳이 있으니

김솔트가 거기다 추가로 메일을 보내줘라라고 했다.

말할 기운도 없던 나는 끄덕끄덕 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터에서 리틀포레스트를 찍던 부장님은

나를 쓱 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 솔트 매니저 하나도 이해 못 한 거 같은데요? 팀장님이 뭐라고 한 건지 알겠어요?


라는 멘트를 날리셨다. 이 양반이?!

내가 이삿짐 박스 10개를 혼자 쌀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마라톤 대회일정과 새 러닝화 쇼핑만 하고

계셨던 분이 뭐가 어쩌고 어째?! 저 문장 어디에 이해 못 할 게 있어!! 박팀장이 외계어 한 것도 아닌데!!!

(부장님이 농담한 거 아닙니까? 네 아닙니다 그런 농담할 사람이 아니에요)

평소 같으면 웃으며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땐 사회생활용 표정과 말투를 버리고


- 지금 메일 추가로 보내라는 거잖아요 제가 어디를 이해 못 했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색하고 되물었다. 박팀장, 나한테 이해 못 한 거 같다는 부장, 김 과장이 동시에 눈이 커졌다.

이렇게 정색하는 건 처음이었고 말투가 날카로운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내 반응에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고 침묵을 깬 건 박팀장.


- 자 해산!!


회사에 있는 동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고 있던 건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매일 얼굴 봐야 하는 사람들끼리 인상 쓰고 있어 봐야 좋지 않으니 그냥 헛소리를 들어도 박박 갈려도 그래요 그러세요 했던 건데 내가 너무 가만히 있었나..? 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저런 반응을 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혈기 왕성하던 20대 때는 회사에서 누가 헛소리를 하면 바로 반박했는데 40대인 지금은

그걸 반박하고 싶어도 이런 일로 기운 빼고 싶지 않아서 참는다.

저거 이겨봤자 뭐해요... 싶은 건 그냥 네 그러세요. 하고 넘긴다.

혹은 나까지 다운그레이드되는 것 같아서 전의를 상실한 적도 많다.

사람들은 무르거나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겐 점차점차 요구하는 것이 선을 넘는 게 많아진다.

여하튼... 이런저런 일로 기운 빼고 싶지 않은 거지 그 사람이 마냥 물러터진 순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기운 빼고 싶지 않았고 그게 결국은 저 간단한 문장을 두고 어린애를 대하듯

뭐라고 한 건지 알겠어요?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요?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니 가만히 안 있어야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만 모든 경우에 통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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