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무속인은 사악하다의 ‘악’을 발음할 때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노인의 비뚤어진 입매가 어머니를 닮았다.
"독해, 사악해."
부적의 효력이 날아가는 동안 귀신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양방에서는 만성 소화불량 환자로 분류됐고, 한의학에선 울화병으로 진단했다. 비타민 챙겨 먹듯 수년간 제산제와 위산 분비 조절제, 상부의 열을 내려주고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한약 등을 복용했다.
"이혼했어요. 아이들도 멀리 공부하러 가고요."
노인이 반쯤 등을 돌리고 혀를 찼다. 그에게는 굿판을 벌이지 않은 대가였고, 나로서는 예정된 일이었다.
거리의 광고판에선 곧 다가올 여름을 알리는 각종 신제품과 휴양지가 떠다녔다. 검은색에 가까운 바다 끝에는 덤불에 휩싸인 할머니의 집이 있다. 한 대범한 아이가 그곳에 수차례 불을 질렀으나 결코 타오르지 않았던 그 집.
마른 덤불에 불을 붙인 아이는 그곳에 들어가려 한 걸까, 그 반대였을까.
도시의 소음 속에 군중의 소란이 스며들었다. 나는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이곳은 판타지였다.
평일 오후 매표소는 제법 한산했다. 찌든 담배 냄새와 각종 커피 향이 섞여 실내 군데군데 사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껌 붙은 시멘트 바닥과 계단은 관광지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자국으로 더께가 덮였다. 아주 오래전, 이쯤 어딘가에서 나는 앞서가는 어머니의 뒤꽁무니를 어리벙벙 쫓아갔다. 잠깐씩 뒤를 돌아보던 어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굼뜨다’는 꾸짖음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말끝마다 ‘애가 굼떠서’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매사에 애가 굼떠서 잘할지 모르겠다는 의심을 품었다. 나는 나를 선택해 준 어른에게 감사를 베풀어야 했기에 천성을 거슬렀다. 세상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점검했으면서도 스치는 온정에 넘치게 행복했다.
어머니 마음에 굼뜨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노력은 매 순간 긴장하는 과민한 감각으로 돌아와 나를 괴롭혔다. 때때로 온정신에 과부하가 걸리는 날엔, 사나흘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육체의 괴로움도 배가 되었다. 심신의 불안정은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고향의 물줄기가 흐르는 하천에서 어린 연어를 방류하던 뉴스를 떠올린다. 북태평양까지 떠났다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연어 떼를, 사람들은 기다리고 기대했다. 사람의 먹잇감이 되지 않고도 모천으로 가지 못하는 연어에겐 어떤 사정이 있을까. 그런 녀석들을 미리 걱정하고 슬퍼해야 했던 나는 열두 살이었다.
혹자는 고향 떠남을 소원하고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결국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라 했건만, 나는 연어의 바다 같은 도시로 나와 꽁꽁 숨어버리고선 고향을 등졌다. 어지러운 미로 길에 숨겨두었던 고향에 가야 하는 단 한 가지 명분은, 할머니의 장례였다.
몇 해 전이었다. 곡기를 끊다시피 하여 열흘을 못 넘길 거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할머니는 한 달을 더 숨 쉬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느그 할미가 애성이가 많았지....... 상주들은 분주하면서도 편안하게 조문객을 받았다. 별다른 지병 없이 근 백 년을 가까이 살았으니, 모두가 호상이라 여겼다.
할머니는 대개 인심이 풍성한 시골 할머니들과 달리 다소 메마르고 고약했다.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동냥을 왔을 때도 내가 밥솥을 열어 밥을 뜨자 눈을 흘겼다. 더러운 밥그릇을 안으로 들였다며 면박을 주고서, 누더기 차림의 늙은 여인을 단박에 쫓아냈다. 삼촌이 사놓은 사탕 봉지가 없어졌을 땐, 제일 먼저 나를 의심하거나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을 깡그리 모아놓고 노려보았다. 자진 발설하지 않을 시 당장 부모에게 알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고서 진짜 도둑을 잡아냈으니 할머니에겐 믿을 수밖에 없는 특효약이었다. 아니, 할머니 마음에 지정한 범인이 생기면 반드시 그래야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수시로 선반을 열어 간장 종지가 나열된 순서를 확인했다.
‘희한하다.’
‘야야, 거참, 희한하다.’
약간의 흐트러짐이라도 느껴지는 날에는 혼잣말로 한참을 골똘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밭에 나가 감자를 캐고, 겨울이면 작은 항구로 나가 양미리를 땄다. 억척같이 일해 번 돈은 비가 새는 지붕을 새로 잇거나 노총각 삼촌의 뒷바라지용으로 장롱 깊숙이 숨겨놓았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초등학생의 손녀딸에게 집안일을 내팽개친 죄목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치우는 것에 서툰 어린아이들을 이해할 만한 심신의 여유가 할머니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눈치껏 돕고자 하는 어린 손주의 어설픈 손길에 되레 골이 오를 때는 본인의 가슴을 치며 화냥년이라는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할머니는 장작불같이 치솟는 감정을 혼자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개나 키워, 안 그럼 화병 나서 금방 죽어, 할머니"
내 버릇없는 언사에 처음으로 아무 반응도 하지 않던 할머니는 내가 떠난 후 정말로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지 마."
수년 전, 할머니는 키우던 잡종을 팔기 위해 시골에서 밤을 지새웠다. 보신탕집인지 개장수인지...... 덩치가 커진 백구를 풀어놓자마자 산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주인의 유인이 필요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백구를 팔고 돌아와 끙끙 앓았다. 그때 할머니의 죄책감을 내가 다시 끄집어냈다. 실수는 아니었다. 할머니 또한 변명하지 않았다.
"개 판 돈으로 새로 산 냄비 그래서 나는 못 쓴다."
전화기 너머 할머니의 목소리는 세월과 함께 저물어갔다. 지난 시절 무지막지했던 행동을 참회라도 하는 듯 통화를 할 때면 서울이모의 소식에 대해 알려주곤 했다. 소식이라고 해봐야, 몰골이 갈수록 썩어 가느니 신빙성 없는 거짓말들만 늘어놓아 동네 ‘후라이꾼’이라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서울이모는 승준이가 가끔 다녀가면서 쥐어주는 푼돈으로 생활을 영위했는데 부족할 때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돈을 빌렸다. 그 모습이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천연스러워 이웃들은 정신이 반쯤 나갔다며 안타까운 혀를 찼다.
할머니는 내게 서울이모가 어떤 큰 의미라도 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통화를 통해 서울이모가 나에 대해 물어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저 두어 번 안부를 물은 적이 있다는 얘기에 나는 언제, 왜, 정확하게 어떤 질문을 했는지, 표정과 말투가 어땠는지 등을 물었다. 정정한 축에 속했던 구순의 할머니도 나의 과한 질문에 그냥 그렇게 물었지 뭐, 라며 뭉뚱그렸다. 할머니는 이모에게 형식적으로 답했다. 찬미는 아주 잘 살고 있다고. 그리고 내게 물었다. 내가 틀린 말 했나? 니 안 잘 사나?
할머니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간간이 용돈을 부쳐드렸고,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나 간혹 만났다. 그때까지도 나는 끝까지 고향에 갈 핑계를 만들지 못했다.
모든 역할을 포기하고서 할머니가 없는 고향으로 향하는 것은 나의 더러운 회피의 역사이지, 시적인 모천회귀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