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닫힌 문2

by 소설 쓰는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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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밥상에 올라온 달걀 프라이 하나에 재빨리 수저를 든다. 할머니는 달걀 접시를 삼촌 쪽으로 슬쩍 밀어놓고선 내 허벅지를 툭 건드린다. 무뚝뚝한 막내 삼촌이 먹음직스럽게 반만 익은 노른자를 떠서 내 밥그릇 위에 올린다. 노른자에 뿌려진 참기름과 적당히 간이 밴 짠맛이 작은 혀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금세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밖으로 나간다. 동네는 조용하다. 골목골목 뛰놀던 아이들은 모두 저녁밥을 지어놓은 엄마의 부름을 받았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초저녁의 고요함이 나는 특별하게 좋았다. 넘어가는 여름 해가 남겨주는 몇 가닥의 빛줄기와 찾아오는 초어스름의 뒤섞임이 마음에 일렁인다. 모두가 숨어버리는 시간이지만 나에겐 가장 못생긴 개구리 한 마리가 논에서 튀어나와 왕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음을 믿게 하는 순간이다. 계단 다섯 개가 있는 낮은 장독대에 올라 글자들을 썼다. 며칠 전 혼자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던 느낌을.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바다를 남겨두고 금방 떠난다. 바다의 아쉬움을 알아챌 리 없다. 수많은 인파들 속에 우직한 바위 하나가 바다의 쓸쓸함을 안다. 바위만이 바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시(詩)가 완성됐다.


쨍그랑, 날이 선 할머니의 목소리에 약간 놀라지만, 재빨리 숙련된 솜씨로 내 키보다 높은 담에서 뛰어내렸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뽀얘질 때까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면 노트에 쓸 멋진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다 이웃집 담벼락에 서서 살구나 오이 같은 열매들을 만져보고 슬쩍 따서 맛을 보기도 한다. 목적지가 없는 것처럼 슬렁슬렁 걷다가 괜한 눈치를 살핀다. 동네 여행의 종착지는 항상 이곳이다. 나는 앵두나무가 사는 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담 너머로 나무 도마에 채소를 써는 소리가 보였다. 어, 찬미 왔구나. 서울이모였다. 엄마의 언니나 동생은 아니지만 동네 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서울이모라 부르며 좋아했다. 이모는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자주 집으로 불러 간식을 대접했다. 이모가 주로 만드는 음식은 누구나 좋아하는 떡볶이였다. 이모는 떡볶이 위에 특이하게 양배추와 케첩을 뿌렸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지만 떡볶이 양념과 양배추와 케첩을 함께 섞어 먹으면 매콤 새콤한 새로운 맛이 상상을 초월했다. 예쁜 테이블에 둘러앉아 소꿉장난 같은 식기와 포크 등이 등장하면 아이들은 우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이모는 시골 엄마들과 달리 도구와 장식에 민감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세련된 식기와 주방 도구에 서커스를 구경하듯 입을 벌렸고, 익숙하지 않았던 새콤달콤한 케첩 맛에 열광했다.

혜성같이 나타난 서울이모는 매일같이 동네 아이들의 무료하고 허기진 시간을 넘치게 했다. 아이들은 투박한 말투를 지닌 강원도 시골 엄마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다정함과 필요한 관심을 서울이모에게서 충족시켰다. 각종 상장이나 칭찬받을 일들이 생기면 자기 집이 아닌 서울이모의 집으로 달려와 자랑했고 나 역시 그랬다. 이모는 내가 가끔 받아오는 글짓기 상장이나 비밀 일기 같은 것을 보여주면 어떻게 아이가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지 칭찬 섞인 위로를 건넸다. 내가 쓴 글을 볼 때면 이모는 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더 슬퍼지려 애썼다. 슬프지 않은 날에는 슬픈 노래를 듣거나 슬픈 상상을 하면서 억지로 무언가를 썼다. 내겐 이모의 마음을 사로잡을 연약한 글이 날마다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이모에게 특별한 아이로 대해졌다. 내가 이모에게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을 때는 모든 일들에 자신감이 넘쳤다.


동네 여행의 종착지인 서울이모가 사는 집 앞에서 멈춰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무엇이 떠오르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건 사물이 아닌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것이니까.

이모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하얀색 블라우스가 선풍기 바람에 하늘거리고 금방이라도 외출할 것처럼 얼굴이 새뽀얗다. 목덜미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이모가 뒤를 돌아보았다. 밥은 먹었니? 나는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부엌으로 난 사람 얼굴만 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슬쩍 웃었다. 이모는 창문으로 초콜릿과 과줄 등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돌아서서 옹알거리며 방바닥을 기어 오는 아기와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을 속삭이더니 창문 쪽으로 고개만 겨우 돌렸다. 어, 찬미 다 먹었니? 생목이 치미는 것을 꾹 참고 초콜릿과 과줄을 우적우적 씹어 먹은 건 우악스럽게 잘 먹어야 간식을 또 먹을 수 있다는 약삭빠른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모는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이모는 오늘도 빡빡이 아저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서울이모는 이사 왔을 때부터 혼자였다. 간소한 짐 가방이 전부여서 이모의 배가 불러오기 전까지 결혼을 했다거나 임신했을 거라는 생각 또한 하지 못했다. 한 번은 늦은 저녁 할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무턱대고 서울이모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불속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이모는 내게 품 안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발정 난 강아지처럼 이모의 살결 같은 이부자리로 쏙 들어갔다. 이모의 팔베개를 하고 이모의 예쁜 브래지어를 만지작거렸다. 예쁘지 않은 나를 예쁜 이모가 예뻐한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 시간을 끌고 싶었다.

“이모는 어쩜 그렇게 요리를 잘해요?”

"찬미도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이모처럼 잘할 수 있어 걱정 마."

이모는 펑퍼짐한 내 엉덩이를 도닥도닥했다.

"우리 찬미, 엉덩이가 아주 부하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런데 찬미야, 아직 생리 안 하니? 옆집 애는 얼마 전에 시작했다고 하던데"

내가 머뭇머뭇하자 이모는 잠시만 하고선 일어나 장롱 서랍장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잘 못 가르쳐주실 거 같은데. 이모가 도와줄게."

이모의 손에는 하얀 면 팬티 두 어장과 생리대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고이 접힌 생리대를 차근차근 풀어 접착 면이 있는 쪽을 보여주면서 팬티에 붙였다.

"자, 봐봐, 아주 쉽지?"

내 표정이 끝내 시무룩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이모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먹었다는 듯 나를 붙잡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생리가 끝나면 한 달 후에 다시 하게 돼. 할머니께 생리대 살 돈을 달라고 말해. 당연한 거야. 알겠지?"

이모는 생리대를 팬티에서 도로 떼어내 동그랗게 말아 휴지통에 잘 버리라는 말로 교육을 끝냈다. 나는 무슨 꾸중을 듣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찬미야, 이모 엄마는 요리사였어. 이모를 위한 요리를 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럼요?"

"글쎄......."

"비밀스러운 거예요?"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이모는 슬쩍 당황하는 눈치였다.

"말할 수 없거나 말하기 싫은 거예요?"

"찬미는 정말 진지하구나? 생각이 아주 많고."

이모는 두루뭉술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면서 부탁조로 얘기했다.

"찬미야, 늘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해."

교장선생님 조례 같은 당부에 나는 이모와 이전보다 더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큰 비밀을 나눈 비밀결사단처럼 결의도 솟았다. 하지만 정작 이모의 비밀스러운 것을 알아낼 수는 없어 아쉬운 마음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시곗바늘이 정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화장품 냄새인지 그냥 이모 냄새인지 나는 그 포근한 기에 눌려 곯아떨어졌다. 10분을 깜박 잤을까? 웬 시커먼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와 양말을 벗고 있었다.

"뚱땡이 가스나는 누구나 이거?"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와 사내는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거렸다.

"찬미야, 이모 남편이야."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달처럼 빡빡머리를 하고 햇빛에 오래 노동을 한 듯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모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빡빡이야!"

푸근한 이부자리를 뺏겼다는 분노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이모와 아저씨는 여전히 키득거리기만 할 뿐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후, 나는 염탐 아닌 염탐을 했다. 매일 산책을 핑계로 이모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담 너머로 보이는 현관문 앞에 남자 신발이 놓여있는지, 있다면 둘이 무얼 하는지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알아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창가까지 다가갔다. 빡빡이 아저씨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 일에 한 번씩 이모를 찾아왔다. 아기가 갓 태어난 후엔, 아저씨와 몇몇 어른이 가끔 다녀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기가 커갈수록 빡빡이 아저씨가 다녀가는 일이 잦아들었다. 나는 알고 있다. 빡빡이 아저씨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여전히 아저씨를 기다리는 이모는, 정말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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