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닫힌 문3

by 소설 쓰는 라떼


이모에게 초대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이모의 눈빛이 마음에 익는다. 이제 나를 자랑할 만한 일이 없어졌다. 5분을 채 걷지 않았지만 이미 빨간 대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기 싫어 신을 끈다.

"야, 문 열어."

세 살 터울의 오빠는 다 먹은 하드 막대기로 내 엉덩이를 쿡쿡 찔러댔다.

"어지간히 좀 먹어라."

오빠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빨간 대문을 뻥 찼다. 일본 순사 같은 잿빛 하복 차림에 발목까지 오는 하얀 나이키 농구화는 패션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좀 우스꽝스럽다.

"할머니! 저 가시나 엉덩이 좀 봐, 그리고 자 브라자 좀 사줘 창피해서 같이 못 다녀.“

오빠의 입에서 나오는 ‘브라자‘라는 단어에 나는 온몸이 화끈거렸다. 어떻게든 다른 데로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치, 니가 언제 나랑 같이 다녔다고!"

"뭐? 니? 이 간나가 보자 보자 하니까 오빠를 상무시하고 앉았어?"

오빠는 나의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나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서울이모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더욱더 힘껏 악을 썼다.

"야야, 우는 것도 재주다 재주야!"

나는 어깨를 최대한 오므려 가슴을 안쪽으로 들이밀고 땅을 짚었다. 엔간한 용기로는 당찮은 일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시내에 사는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열두 살 손녀의 브래지어와 생리대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한창 메이커를 따지는 머스마까지 속을 썩인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할머니는 고모와 전화할 때면 지 엄마를 닮아 그렇게 생겼다느니, 지 엄마를 닮아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것만 배우고 싶어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기 직전,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야야, 길수 엄마야, 갈수록 지 엄마 똑 빼닮는다니."

나는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베개에 얼굴을 맞대고 아기가 되어 ‘엄마’라는 단어를 옹알거려 보았다. 음, 마, 마마마마마마.......

날이 밝자 할머니는 이부자리 위에 늘어진 브래지어 두 개를 던져주었다.

"의구, 창피해라. 못된 년이 가슴만 크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냐?"

"못 들었어."

아마 뒷집이나 뒤에 뒷집에 들러 손녀의 가슴에 관해 떠벌리고서 얻어왔거나, 장롱 깊숙이 박혀있던 고모들이 입던 속옷일 것이다. 나는 브래지어를 하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개구리처럼 유난히 튀어나온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 유전자는 외할머니의 외할머니부터 시작되었을까? 도드라진 눈알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백 번을 센다. 강박증으로 시작된 이 의식은 방문을 열기 위한 통과의례다. 손바닥을 떼면 약간의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진다. 창밖으로 오빠와 삼촌이 번갈아가며 세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깊숙이 숨겨놓은 초경의 흔적이 들키지 않았는지 확인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학교로 난 지름길은 조금 험하지만 가장 좋은 생각의 장이었다. 산중턱에 홀로 앉아 선생님이 추천해 준 동화책을 좀 읽다 말고 집에서 굴러다니던 소설책을 꺼냈다. 가난한 생활을 하던 남자는 마침내 성공한다. 하지만 남자의 성공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여자가 있다. 남자는 성실과 정직으로 돈 버는 일에선 성공했지만 사랑은 실패했다.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사랑에선 통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만신창이가 된 육체만 남은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기다린다. 아무래도 이 소설책은 여고시절 고모들이 탐독한 것임에 틀림없다. 등교시간을 훌쩍 넘어 논두렁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별이나 사랑에 관한 가요를 불렀다. 공책에 옮겨 적었던 노랫말을 웅얼거리며 날씬한 여자가 된 모습을 상상했다. 그 날씬하고 가냘픈 여인이 멋진 남자와 사랑을 하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논두렁길에서 발길을 돌려 서울이모에게로 갔다. 아기를 업고 빨래를 너는 이모의 모습이 그저 구슬펐다. 빡빡이 아저씨를 기다리는 이모의 초조함이 뒷모습에서도 전해졌다. 빡빡이 아저씨는 이모와 아기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모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한다.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그날따라 나는 산책을 두 번 나갔다. 이모에게 우리 지역 출신인 김동명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 대회에 나가서 온 가족의 꽃다발 지지를 받은 다른 반 반장을 제치고 내가 상을 받았다는 자랑을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들렀을 때는 웬일로 이모가 외출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방문은 밤 9시쯤이었다. 이모 집을 다시 찾아갈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하다가 늦었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9시가 돼서야 집을 나선 것이다. 이모의 집은 이층짜리 양옥집에 혹처럼 툭 튀어나와 마치 세를 주려고 억지로 만들어서 붙인 꼴이었다. 나는 이모 집으로 연결된 내 키만 한 대문을 열었다. 낡을 대로 낡은 고물을 붙여놔서인지 작은 힘에도 버티지 못하고 끽끽 거북한 소리를 토했다. 창문에 불이 켜져 있지만 조용했다. 나는 조심스레 현관으로 다가가 이모를 불렀다.

"이모“

"이모“

그때 문 안에서 갑자기 어둑한 그림자가 돌진했다.

"너 이 녀석!"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양다리를 발발거렸다. 몸을 반쯤 구부리고선 작은 문을 열어젖힌 그가 꺼뭇한 입술을 뗐다.

"애 엄마 어디 갔냐?"

나를 내려다보던 시커먼 그림자는 신발을 신고 나와 슬며시 현관문을 닫았다. 나는 점점 뒷걸음질 치려 애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식은땀만 흥건했다. 그가 묻는 말에는 모른다는 고갯짓만 뇌일 뿐이었다.

"나 봤다는 소리 일절 마라."

시커먼 그림자는 골목길 음영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고 잽싸게 집으로 달려가 장독대에 올랐다. 가쁜 숨이 가라앉을 때쯤, 앵-하는 아기의 신음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이모였다. 그가 이곳을 떠나버린 지 불과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무언가 불편한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기진한 이모의 걸음걸음이 애잔했다. 마음에 폭풍이 일었다. 장독에 몸을 숨기고 돌아선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행여 소리가 새어나갈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선 숨을 삼켰다.

담 너머로 치맛자락 쓸리는 소리가 들린다. 도둑고양이처럼 스르륵, 성큼성큼 내 시야에서 유유히 멀어져 갔던 사람. 나는 떠나는 여자를 오롯이 두어야 했던 기억과 서울이모에게 억울한 시간이 되어 버린 간발의 십여 분을 원망하였다.


빨래를 널던 이모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찬미야, 오늘 여름 방학하는 날이라지?"

이모는 잠든 아기를 방 안에 눕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 나서 나를 작은 평상으로 데려갔다. 대서(大暑)의 오전 해는 제법 강했지만 약간의 바람이 지나갔다. 이모는 투명하고 넓은 화채 그릇에 미숫가루를 듬뿍 담았다. 우리는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미숫가루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스산해 보이는 이모의 행동이 미묘하고 어색한 기운을 자아냈다. 창문으로 잠든 아기를 여러 차례 확인하던 이모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찬미야"

나는 네,라고 다부지게 대답하면서도 심장이 죄어 왔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 살짝 겁이 났다. 따가운 해는 우리가 마주한 평상 위를 점점 침범해 왔다.

"이모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

"혹시, 얼마 전에 우리 승준이 아파서 병원 다녀온 날 있잖니?"

나는 아저씨가 다녀간 사실을 숨긴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이모 앞에서 늘 정직한 어린이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나를 괴롭혔다. 눈앞에 이모의 모습이 힘없이 흔들렸다. 나는 그저 네,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반지’라는 예상치 못한 단어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지요?

"그게 이모 결혼반지라서 말이야."

"찬미야, 그 반지는 이모한테 정말 중요한 거야. 정말 정말. 아니, 제일 중요한 거야."

이모는 내 몸에 더 바싹 다가와 구차하게 부탁하듯이 몸을 낮추었다.

"가장 중요하다고요? 반지가요?"

"그래, 찬미야."

"승준이보다 더요?"


속임수임을 뻔히 알면서도 또 속아주던 소설 속 남자는 왜 이모 옆에 없는 걸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오던 이모의 남자나 이모의 남자 같은 여자에게 모든 걸 뺏기고 망부석을 자처한 소설 속 남자나, 이모가 승준이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표징에 대해서.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의미를 나로서는 이해할 깜냥도 되지 않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정색한 이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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