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0년 전 일기를 들춰보다.

-10년 동안 변한 것들

by 소설 쓰는 라떼

비밀번호까지 걸어놓은 한글 문서가 하나 있다. 10년 전에 쓴 일기다. 매일 쓴 것도 아니고, 매해 쓴 것도 아니다. 10년 전, 우리 가정에 폭탄처럼 들이닥친 일들이 있었다. 어렵고, 답답한 마음을 일기로 풀었던 시기다. 요즘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는 중인데, 바르바라라는 여성이 자신의 일기를 공개하는 부분이 있어서 잠시 생각이 나기도 했다. 이곳에 공개를 하자니, 너무도 개인적인 부분이 많아서 한 부분을 추려봤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나의 첫째 아이의 지독한 잔병치레 이야기다.


2015년 4월 5일

딸아이의 감기가 다 나은 듯 보여서 점심부터 남은 약을 먹이지 않았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고 나니 갑자기 벚꽃이 보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딸이 태어나기 직전에 벚꽃이 만개했었고, 첫돌이 다가올 때쯤 또 시즌이었으나 잠깐 나가려던 그날 비가 내렸다. 이제 잘 거닐고 꽃이 무엇인지도 알기에 봄바람 살랑 맞으며 가족끼리 꽃구경다운 꽃구경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주말에 아버님께서 승용차를 쓰신다고 하여 축제가 시작되기 나흘 5일 전인 오늘 밤에 무작정 여의도로 출발했다. 생각보다 바람이 세고 차가웠다. 아이는 마스크도 쓰고 모자도 썼고, 내복도 입었지만 거닐며 구경하기엔 무리였다. 후딱 30분 정도 거닐고 군밤과 쥐포를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바람은 찼지만 딸아이는 벚꽃을 만져보고 개나리도 만져보고 꺾어준 꽃들을 손에서 절대 놓지 않았다. 꽃구경 나가기 전부터 꽃구경 하러 나가자~했더니 꽃 보러 가자! 가자! 하며 들떠있던 딸내미는 돌아오는 내내 군밤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씨도 안 따라줬지만 아이는 꽃을 정확하게 보았고 만져보았고, 맛있는 군밤도 먹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집에 돌아와 드는 생각이 그냥, 이렇게만 살고 싶다.


2015년 4월 8일~9일

딸내미가 어젯밤 정상체온을 회복하면서 잠들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새벽부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으면 잠시 떨어졌다 다시 오르기를 저녁까지 반복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39도를 넘어 아이가 약간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기침과 콧물이 별로 없어서 열이 나도 아이는 잘 놀았는데 39도가 넘으니 처지는 게 눈이 보였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소아과가 밤 9시까지 진료를 보기에 갑자기 다시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타이레놀 해열제가 든 저녁 감기약을 먹이고 1시간 채 되지 않아 맥시부펜 계열의 해열제를 먹이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38.8도까지 내려갔고 아이는 다시 잘 놀았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기침과 콧물이 안 보인다고 해서 체력이 다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을 텐데 그 상태에서 재감염되었을 거라 얘기했다. 다 나은 듯 보여 감기약을 끊고 월요일에 벚꽃을 본다며 나간 내 잘못이다. 단순 감기라면 정말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또 목이 부어서 열이 나고 있어 그게 힘들긴 하다. 편도 수술을 해야 하는 정도인지..... 목요일 새벽까지 괜찮다가 5시 반에 일어나서 이마를 만져보니 이마가 뜨거웠다. 아이를 깨워 물을 많이 먹이고 해열제를 먹였다. 그리고 수건을 빨아와서 다 벗기고 닦아주었다. 아이는 깨지 않았다. 이따 일어나면 유모차를 태우고 인천예술회관역에 있는 길병원으로 아버님 병문안을 갈 예정이다. 아직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에효...



100일에 10킬로, 첫돌에는 13킬로를 넘은 첫째 아이였다. 브로콜리나 청경채 이유식은 물론, 처음이라 농도 조절에 실패한 묽은 죽이든지 뻑뻑한 된죽이든지 뭐든 잘 먹었다. 수유도 오래 했다. 그런데 그놈의 감기 바이러스는 자주 찾아왔다. 온도, 습도에 신경을 쓰고 어린이 영양제와 한약까지 먹여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첫째라 더 모르고 어려웠다.

물론, 10년 전 일기에 나타난 나의 불안과 초조함이 지금은 약간 이해가 안 될 만큼 이상하기도 하다. 3년 후에는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 녀석도 비염을 달고 살며 양약이 키워줬나 싶을 만큼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저렇게 체온을 매 순간마다 정확하게 쟀나 싶고, 열감기가 걸리면 걱정되고 힘들긴 하나 저 정도로 병원을 계속 가면서 불안해했나 싶다. 돌보지 않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감각으로? 상중하를 매긴다고나 할까.

둘째 아이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엄마, 누나는 애기 때 초록마을에서만 사 먹이고, 나는 호호마트에서 사 먹였지? "

첫째를 키울 때는 내가 유기농 유기농 그랬었다는 수다를 누구한테 한 적이 있는데, 아이가 다 듣고 알고 있었다. 뭐 그거 가지고 나를 원망한 건 아니고, 초록마을과 호호마트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아는 듯했다. 첫째가 라면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초록마을 근처에는 가본 적이 거의 없으니.

" 아 엄마가 해 보니, 호호마트에서 산 것도 좋더라고. 그런 경험에서 호호마트에서 사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

이유식 마스터기로 정확한 양을 재서 이유식을 만들었던 첫째 아이와 달리, 둘째의 이유식은 밥솥에 감으로 때려 넣은 재료들이 한 번에 들어갔다. 누나가 타던 핑크색 바비 자전거를 물려받고 신난다고 좋아했다. 8살에 파란색 자전거를 사줬을 때는 "이제 나 안 창피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창피했었구나. 나는 그냥 귀여웠는데 말이다.


10년 전 일기 속 나에겐 첫째 아이가 세상의 전부였다. 35개월이 되어서야 기관에 보냈기에 매일을 종일 붙어있었다. 아침 먹고, 산책할 때 나비를 쫓아 달리는... 햇살 아래 나의 아기가 눈앞에 어린다. 그때의 좋은 감정이 마음에 남아서 나는 여전히 두 아이와 일찍 저녁 먹고 산책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10년 전에는 둘째를 나중에 낳더라도 첫째에게 준 사랑이 너무 크고, 첫째가 너무 예뻐서 미안하지만 그만큼은 사랑 못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10년 후의 지금은 어떠한가.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는 아기를 재운다며 잔소리하고, 떨어져 자게 한 게 미안하고, 자기 취향은 없이 무조건 물려받아 입느라 레이스 달린 핑크 티셔츠도 입어줬던 둘째에게도 미안하다.

동시에 무조건적인 수용은 없다. 배려와 양보, 단체생활 속 규칙, 선생님을 향한 예의 등을 다소 엄하게 가르친다고 둘 다 잡도리한다.


그뿐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 인생이 있지'를 계속 되뇌는 중이다. 나는 뒤에서 기도하고, 응원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라는 걸, 사춘기가 슬슬 오기 시작한 첫째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양육의 목표가 독립이라지만, 한국 부모님들은 또 그렇지 않지 않은가. 나도 생각한다. 나의 아이들에게 전화로 하소연하는 말많은 엄마가 되지 않기를. 내가 아이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