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어떤 글을 써볼까. 휴대폰을 집어 들고 글감을 생각해 본다. 이런저런 일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다 한 가지,무척 쓰고 싶은 주제가 떠오른다. 제목을 적고 소제목을 간단히 적어본다.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 두서없지만, 모든 감정을 털어 내며꺼낸기억들이 소멸되기 전에 부랴부랴 하얀 화면에 탈탈탈 쏟아낸다. 어, 근데 벌써 한문단을다 썼네. 조금 쓰다가 막히면 대충 저장하고 닫으려 했는데 쭉쭉 써진다. 그럼 내친김에 조금 더 이어가 볼까.재밌다. 글이 안 써져 문제지 이렇게 속력이 붙었는데 굳이 급제동 걸 필요 있나. 반짝이며 가동하는 뇌의 회로에 박차를 가한다. 어라, 두 번째 문단도 완성됐다.
사실 휴대폰으로 글을 쓰려면 잡는 왼손바닥이 휴대폰의 모서리를 지지하고 오른쪽과 왼쪽엄지 손가락으로 천지인 키보드를 누르고 손목으로무게를 버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중해서 한창 쓰다 보면 어느새 이 모든 부위들이 저리고 욱신거린다.신기한 건 두 개의 손가락으로 글을 쓰다 보니 노트북 보다 훨씬 더디게 타자를 치게 되지 않나.그러다 보니 쏟아지는 생각들이 글자의 완성 속도에 맞춰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조용히 기다려준다. 더 빨리 타자를 치라고 재촉하지 않고 내가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충분히 완성시킬 때까지 차분히 지켜본다. 그렇게 한문단이 다 완성되어 이야기를 전환해야 할 때 시기적절하게 다음 기억을 끄집어내 주니,이거야 뭐 다 만든 떡날름집어먹기다.어느덧 고찰 부분을 적고 있는 나를 보며 한문단만써도 오늘은 수확이다별 기대 없던 마음에 뿌듯한 감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언제 이렇게 많이 성장했어, 벨라야? 궁둥이라도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퇴고는 내일로 미루고 일단 저장해 서랍에 넣기 완성.
그런데 말입니다. 노트북은 이상하게 이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질 않는다는 게 묘하다 이겁니다. 브런치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작성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어찌하여 머릿속이 막연해지는 것인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면의 압박감 때문 같다. 휴대폰으로는 몇 자 적다 보면 금방 줄이 넘어가니 노트북보다 상대적으로 글을 많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성취감이 빨리온다. 오 벌써 두 문단이나 썼네. 눈에 보이게채워지는 느낌에 신이 나 글도 더 술술 잘 써진다.그러나 노트북은 훨씬 가로의 길이가 휴대폰보다 길다 보니 그런 감이 덜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글을 쓴다는 자체가 생각이 글러먹은 거 아닌가? 종이에 쓰건 휴대폰에 쓰건 노트북에 쓰건 생각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렇게 상황 탓 하면서 장비탓하는 거 좀 못나 보이네? 근데 원래 이건 이래서 불편하고 저건 저래서 싫고 좀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글이 빨리 채워지네 성취감이 어떻네 그런 게 중요하긴 하다. 공부도 어느 장소에선 잘되고 어디에선 안되고 그런 것처럼 글쓰기도 예민한 작업이니 따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누가 보면 유명작가 나셨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김수현작가님이 꿀밤 한 대 콱 쥐어박으실 얄미운 오두방정이다.
그런데 요즘 비상사태다.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고 눈이 침침하고 시렸다가 글자가 번져 보여 심지어 요새는 눈을 거의 반쯤 감고 화면을 봐야 초점이 맞는다. 시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안과전문병원에 방문해 정밀검사를 꼼꼼하게 받아보았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노안에 난시가 살짝 있지만 돋보기나 다른 조치를 취할 정도로 시력에 문제가 있지는 않단다.
"그렇게도 잘 안 보이세요?"
의사 선생님이 오히려 내게 증상을 되물으시니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 혼자 굳이 병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쑥스러움이 얼굴을 타고 올라온다. 의사도 괜찮다며 내 말을 의아해하는데 오히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딱히 상황이 해결된 건 없으니 답답해야 할지 헷갈리더라. 요새 독서와 글쓰기가 이전보다 더 재밌어서 열심히 몰두하고 있는데 이럴 거냐 진짜.
아무 데나 쓰라고,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하늘이 벌하셨나. 왜 눈이 이모냥으로 안 좋아지냐 이 말이다. 침침하지 말라고 수년간 루테인도 열심히 먹고 있는데 휴대폰이나 노트북만 봤다 하면 금세 눈이 시리고 앞이 흐릿해진다. 종이로 된 책만 볼 때는 못 느끼는 현상. 앞으로 휴대폰 사용을 좀 줄이고 글을 쓰는 시간도 하루 30분 정도만 짬을 내서 후드득 쓰고 멀리 두어야 할 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장거리 연애가 서로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듯, 글쓰기에 대한 내 깊은 사랑으로 눈의 극심한 피로도를 꼭 극복해내고 싶다. 생각해 보니 글 잘 써지는 장비가 휴대폰이냐 노트북이냐만 따질 때가 좋았다. 이렇게 눈 걱정은 배제하고 했던 말이니까.건강이 삶의 질을 얼마나 좌우하는지 몸으로 느끼는 요즘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