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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Aug 15. 2024

샤넬 바디워시를 아끼지 않고 쓰는 여자

팍팍 쓰자

동네 엄마들 모임에서 한창 수다가 재밌게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언니가 내 자리로 오더니 귓속말로 잠깐 나 좀 보자고 한다. 무슨 일일까 궁금 반, 설렘  엄마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언니는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흰 꽃, 일명 까멜리아가 달린 쇼핑백을 쓰윽 내밀었다. 묵직한 만큼 부담감이 올라온다.

"자기야, 생일 축하해~"


10월에 내 생일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언니의 미소가 무색해질까 나도 눈웃음으로 화답하며 고맙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것도 신기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선물을 주면 엄마들 앞에서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몰래 준 거니까 숨기고 들어가야 맞을 것 같은데 그러자니 부피와 무게가 상당하다. 고마운데 난감한 이 기분, 상당히 곤란해진다.


언니는 먼저 착석을 하고 나는 시간차 공격으로 뒤늦게 들어가 뒤춤에 쇼핑백을 숨기고 헤헤 웃으며 뒷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로 자리에 쓰윽 앉았다. 누가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게 더 바보 아닐까.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세상 어색하게 웃으며 뒷짐 지고 나타난 행색이 영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말이지. 다시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지만 심장이 두 근 반 세 근 반 벌렁벌렁거려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저 백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너무 궁금해서였다. 꽤 묵직하고 사이즈도 어느 정도 되는 것이  왠지 가방 같은 거다. 설마, 나랑 이제 7개월 정도 안 언니인데 가방을 선물할 정도로 날 가깝게 생각한다고? 친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설마 진짜라면 난 언니 생일에 무슨 선물을 해줘야 하지? 난 샤넬백을 '짠' 하고 선물해 줄 돈은 없는데 큰일이네.


갖가지 생각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한 엄마가 이제 애들 올 시간이니 집에 가자고 일어섰다. '오예, 집에 간다. 어서 가서 풀어봐야지.'머릿속엔 온통 쇼핑백 안의 내용물 생각뿐이었다. 앗 근데 집에 가려고 일어서면서 긴장의 끈을 놓친 나머지 눈치 100단인 키 큰 언니가 말을 건다. 샤넬 선물 받은 것 같은데 누구한테 받은 거냐고, 혹시 남자친구냐며 부럽다는 농담을 하며 혼자 깔깔 웃는다. 차마 왕언니가 줬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별거 아니라는 듯이 또다시 헤헤 웃으며 그 상황을 대충 넘겨버렸다. 해명할 시간이 없다. 빨리 선물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 지금 카드 48개월 할부를 해서 저 언니 가방 사줘야 할 판국인데 누가 쇼핑백을 본 게 무슨 대수인가.


쇼핑백에서 묵직한 내용물을 빼내어 경건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단단한 박스가 있었고, 호옥시? 하며 모두 풀어보니 걱정 마, 벨라 하며 바디워시와 바디로션이 밝게 나를 반겨주었다. 다행이다, 안심하면서도 살짝 서운한 이 감정은 뭐지? 진짜 백이라도 받을 줄 알았던 거? 나 언제부터 이렇게 통이 커진거야?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언니에게 고맙다고 인증샷 보내주고 귀한 몸이시니 화장대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아직 남은 화장품들이 많아서 그거 다 쓰면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예쁘게 두고 매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샤널백과 비교할 가격대는 아니지만 유사 제품들과 비교했을 땐 비싼 아이들 아닌가, 내 돈으로는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얘들을 내 몸에 바르게 생겼으니 생각만 해도 좋아서 입이 씰룩거렸다.


그런 지 3년.

어느덧 다른 화장품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샤넬 바디워시가 쓰윽 얼굴을 내미는 날이 있었다. 어머나, 이걸 받은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야? 오늘부터 써야겠다 싶어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24년 5월까지다. 2달 지났네. 이걸 써 말아? 멀쩡한 제품 잘 모셔둔다고 하다가 썩히고 말았다. 버리자니 아깝고 쓰자니 찝찝한 이 기분. 누굴 줄 수도 없고 온전히 내 몫, 내 책임, 내 결정인데 이런 초이스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결국 빨리빨리 써버리기로 결정하고 그날부터 바디워시를 쭉쭉 짜서 썼다. 다행인 건 중간에 열어보지 않아서 부패하지는 않았는지 향도 좋고 발림성도 굿이었다. 근데 몸을 다 씻고 말리고 나오면 왠지 모르게 간질간질거리는 건 기분 탓인가. 빨갛게 염증이 올라오지 않았으니 괜찮은 거겠지? 바디로션은 씻어내는 게 아니고 몸에 바르고 계속 있어야 하는 거라 그냥 핸드크림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샤넬 바디워시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바디로션을 핸드크림으로 팍팍 써버리는 사치의 온상인 나라는 여자, 한심해 보이는가? 아니면 기한 지난 제품 바르면서 샤넬샤넬 거리며 은근히 좋아하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이는가?


사실 향수나 색조화장품도 아니고 바디제품을 앞으로도 내 돈 주고는 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맘 좋고 부자인 언니 덕에 이렇게 써보기도 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게다가 기한 내에 썼으면 조금씩 조금씩 아껴 썼을 것을 양 걱정하지 말고 팍팍 쓰라고 유통기한 다 지나고 발견하다니. 이 또한 원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세상에는 고맙다 생각하면 감사하지 아니한 일이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짜증 날 수 있는 상황도 긍정적인 기분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왕 쓰기로 한 거 부지런히 사용해서 외출할 때 샤넬향기 가득한 부내 나는 여인이 되어 보련다. 제발 다 쓸 때까지 피부병아, 게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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