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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Aug 08. 2024

병아리와 소를 본 적 없는 12살, 우리 딸

그럴 수 있어

잠들기 전 딸과 두런두런 나누는 밤의 대화, 아니 수다가 참 좋다. 그 시간에는 딸의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고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술술 이야기해 준다. 마주 보고는 잘 안 나와도 불 꺼진 방 안에서 허공에 대고 하는 말에는 마음을 더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이라도 쓰이는 걸까.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도 잠들 줄 모르는 수다쟁이 모녀를 보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밤 12시에는 잠들어야 하는 신랑은 제발 잠 좀 자라며 우리를 채근한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냐고, 낮에 좀 떠들으란다. 낮엔 낮의 수다가 있고 밤엔 밤만의 수다가 엄연히 따로 있다는 걸, 여자가 되어본 적 없는 남편이 알 리 만무하지.


몇 달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의 대화를 신나게 하고 있는데 예전에 브런치에 올렸던 '날아라 병아리' 글에 나온 병아리 이야기가 나왔다.

https://brunch.co.kr/@pinksone79/37


"병아리를 손에 올려놓고 쓰다듬으면 밀크(우리 집 강아지) 털처럼 진짜 부드럽고 보송보송하잖아, 그치? 너무 귀여워"

"병아리 털이 그렇게 부드러워? 난 안 만져봐서 모르겠네"

"엥? 너 병아리 만져본 적 없어?"

"난 본 적도 없는데?"

"그럴 리가. 병아리를 본 적이 없다니. 진짜야? 왜 병아리를 본 적이 없지? 그럼 너 병아리 모습은 어떻게 알아?"

"그건 책이나 티브이에서 본거지. 그 외에는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럼 소는? 소는 동물원에서 봤지?"

"동물원에 소가 왜 있어, 목장에 가야 있지"

"아 맞다, 소는 목장에 가야 있지. 그럼 돼지는?"

"돼지는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감귤농장에서 귤 따면서 흑돼지만 봤지"

"그럼 분홍색 돼지는 못 본거야?"

"응 한 번도."


이해력이 딸리나? 아이가 병아리, 소, 돼지를 본 적이 없다는데 왜 못 봤냐고 묻는다. 어쩌라고. 그나저나 이게 뭔 소린가. 그 흔한 동물들을 왜 우리 딸은 못 본거지? 수족관에 있는 동물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 열심히 다 보여줬는데 말이야. 허허, 생각해 보니 하필 이 동물들은 동물원에 없구먼. 그런데 아이 데리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으니 당연히 봤다고 여긴 거다. 뭐 살아가는데 반드시 안 보면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영유아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들을 아이는 여태껏 실제로는 보지도 못했다니. 나는 병아리를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앞에서 처음 만났고 소도 초등학생 때 아빠 친구분 목장에서 몇 박 며칠을 묵으면서 지겹게 봤었다. 분홍색 꿀꿀 돼지도 부모님을 따라간 곳에서 돼지우리를 본 기억이 분명히 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아이도 당연히 보았을 거란 착각이 이제야 들통이 난 것이다.


아이 어릴 때부터 공연장, 전시회, 과학관, 놀이동산 등을 바삐 돌아다니며 체험할 것들, 볼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다양한 것들을 접하게 해 주었다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에서 구멍이 나다니. 막연히 병아리는 이렇게 생겼겠지, 소/돼지는 저렇구나, 상상만 하며 자라온 딸아이가 가엽게 느껴졌다. 영유아 때 가장 강조하는 게 오감놀이인데, 잔디에서 뛰어놀고 물에 풍덩 들어가고 흙도 좀 만져보고 동물도 안아보면서 옷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온몸이 다 젖어도 보고 넘어져도 보면서 몸으로 직접 겪는 것들을 많이 경험시켜줬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부족했다 싶다. 다칠까 봐, 더러워질까 봐, 지저분한 것 먹을까 봐 그게 너무 싫은 엄마는 자연친화적인, 몸으로 신나게 노는 곳은 잘 데려가지 않았다. 야외에서의 옷가지, 물품 등의 뒤처리도 복잡하고 체력도 달리데다 깔끔까지 떠는 엄마 덕분에 그동안 아이는 깔끔하게 지냈는지는 몰라도 그 흔한 동물 한번 본 적 없는 12살이 되어버렸다.


완벽한 부모는 없다. 최선을 다하는 부모만 있을 뿐. 나는 그동안 영혼을 갈아 넣어 아이를 키웠지만, 착각을 하든 실수를 했든 아이를 100% 만족시키고 모든 걸 경험하게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부족한 점을 깨달았으니 실천을 하면 되는 거겠지. 실행력 좋은 엄마는 죄책감은 이제 그만 툭툭 털어버리고 가까운 농장 검색에 들어가려 한다. 아이가 13살, 중학생이 되기 전에. 부릉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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