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이 없었다. 뒤주에 갇혀 죽어가던 아들에게 의식 저 너머에서 들려왔을 하지만 또렸했을 그 말이 참으로 무책임해서 슬펐다. 그 말 한 마디로 아들을 보내기에는 너무도 무책임했다.
영조의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눈빛을 잠깐만 마주해도 온 몸이 서늘해지는데 그 눈빛을 수십 년 간 마주했을 세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체 없는 흉기가 매일같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잘하면 당연한 것이고 못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질책을 받아야 했고,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삐져나오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불호령이 떨어졌고, 상처가 될 만한 수많은 언행을 견뎌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 어린 나이에 그게 가능할 리 있었겠는가.
영조는 내가 보기에 사도세자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과장하면 단 한 순간도. 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권력욕과 콤플렉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도구일 뿐이었다. 아마 세자도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게 아마 더욱 그를 엇나가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저 그런 도구였을 뿐이고, 그 도구로써의 기능을 상실하자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 조선의 왕이 그랬다. 왕과 세자는 부자지간이라기 보다는 왕과 왕위를 지켜갈 조력관계이고 그게 틀어지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관계였다. 내가 본 왕과 세자는 거의 그랬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가져야 할 많은 시간과 추억은 뒤로한 채 왕만을 위한 왕위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 둘에게, 아니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아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남아있었을리 만무하다. 잘할 땐 내 아들, 못할 땐 투명인간이 돼 버리는 관계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단순히 아버지는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 아들은 왕관을 무게를 견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건 정말 무책임한 말이다. 영조가 한 대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