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용감한 친구 같은

영화 '터널'을 보고

by 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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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일 뿐이야'라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해져가고 있다. 자꾸만 많은 영화들이 현실과 닮아가고, 아니 현실이 영화를 닮아가고 있다. 이제 영화 속의 무서운 장면이나 끔찍한 상황들을 볼 때 눈을 질끈 감고 '이건 영화일 뿐이야'하고 나를 안심시킬 수가 없다. 그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김지훈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를 봤을 때도 그랬다. 이 영화가 무서웠던 것은 잔인한 장면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가 잊힌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일들은 우리나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 <터널>은 한 사람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유머가 꽤 있다. 그런데 그 유머 속 어떤 장면들은 씁쓸함이 묻은 웃음이 나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 사람이 매장되어 있는 무너진 터널 앞에서 유가족을 위로한답시고 모여 사진을 찍는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모습, 설계도가 잘못 그려져 있어 구조 계획을 처음부터 전부 다시 짜야 하는 상황 등 그런 유머들이 너무 현실과 닮아 있어서, 저런 상식 없는 행동들이 내가 불과 일 년 전 TV 뉴스에서 본 장면이어서 말이다.



이 영화의 상황이 매우 단순한 상황임에도 많은 관객들이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나처럼 전과 다르게 영화와 현실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정수(하정우)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된다. 누구의 잘못인지 파악하기 조차 어려운, 수많은 비리로 만든 각종 시설들로 인해 나도 정수처럼 재난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또 그 재난 속에서 살아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바로 이 영화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현실 속에서 봐 왔으니까.



<터널>은 영화가 끝난 후에 마음이 더욱 심란해지는 영화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또 다른 영화와 같은 현실 속으로 던져지게 되고, 그 속에서 어떤 재난이 닥쳐도 나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이 고개를 내밀면서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구조된 정수가 세현(배두나)과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터널을 보고 움찔한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정수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간접적으로 트라우마를 체험한 것처럼 환풍기 숫자를 세고, 나는 터널의 어느 부분쯤을 가고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고 어떻게 보면 슬픈 말이지만 일단 한국에서의 나는 무조건 내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의 재난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재난 속에 인간이 당하고, 또 인간끼리 외면하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스럽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세월호 등과 같은 사고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 현실이, 천재지변보다 인재에 의한 희생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 더 영화 같다. 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터널 안에 인간이 갇혀있다는 데도 새로 개통할 터널을 걱정하고 있는, 크던 적던 돈 걱정을 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다가도 그래도 끝까지 터널 안에 '인간'이 갇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얘기하는 대경(오달수)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이 아이러니하다. "저건 영화니까."



영화 자체는 개인적으로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내가 생각했던 영화가 아니었다. 역시 <괴물>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블랙 유머, 평범한 유머, 캐릭터, 각종 디테일 등 역시 <괴물>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내가 <괴물>을 봐 버린 탓에, 아니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이미 만들어버린 탓에 웬만한 재난 영화는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 하고 있다. 뭐 그들도 딱히 나에게 감동을 주려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 확실해진 사실이 있다. 배우 '오달수'와 '하정우'는 대체불가능한 배우라는 것. 이 영화의 그 캐릭터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움직이지 못했을 것 같다.



<터널>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재난영화인 것 같다. 나쁜 친구 대신 때려주고 욕해주고 다친 나를 위로해주는 멋지고 용감한 친구같은 영화. 그건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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