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대가의 소설이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by Ann
소설가라는 직업의 넘을 수 없는 벽을 맞닥뜨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다.







타고난 성향과 생각이 완전히 다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집요하고 끈질겨야 하고 상상력이 남달라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과연 이 소설을 한 사람이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첫 만남, 골드문트의 방황과 성장, 그리고 재회가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특별한 사건보다 나르치스라는 사람의 생각과 인생, 골드문트라는 사람의 생각과 일생을 그저 관찰하는 소설이다. 완전히 다른 두 인물의 인생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낸다. 나는 중간에 잠시 멈춰서 입을 아! 벌리며 혼잣말을 했다. '아! 이거 한 사람이 쓴 거지......'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금욕적이고 절제된 삶을 살고 수행에 모든 것을 바친 나르치스와 누구보다 철저하게 본능과 욕망을 따르고 자신의 온 감각에 충실했던 골드문트의 정반대의 삶을,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정반대의 가치관과 각종 정의들을 너무나도 생생하고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들을 바탕으로 나 또한 생각할 거리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책을 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 둘은 태양과 달이며 바다와 육지다. 우리의 목표는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보고 존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독백이나 대화가 많다. 두 사람의 그런 독백과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같은 것을 두고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다른 성향인지를 보여준다. 그 내용을 보고 있으면 자꾸 나의 의식은 작가에게로 향한다. 평소 작가의 생각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독백과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많고 긴데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읽고 있으면 작가의 삶에 대한, 예술에 대한 깊은 고뇌와 그가 추구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스승의 꾸지람은 옳았다. 그래서 골드문트는 변명을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자기가 믿을 만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일감이 그를 꼼짝 못 하게 붙들어 매고 그에게 힘든 과제가 주어지거나 혹은 자신의 능숙한 솜씨를 깨닫고서 기뻐하는 경우에는 그는 열성적인 일꾼이었다. 하지만 힘든 수작업은 싫어했으며, 비록 힘들지는 않아도 시간과 근면이 요구되는 일 역시 싫어했다. 그런 일은 대개 수작업을 요구했고 성실하고 참을성 있게 수행되어야만 했는데, 골드문트는 그런 일을 도저히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는 이따금 그런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방랑 생활 때문에 게을러지고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기질이 그의 속에서 자라나서 그를 압도하기에 이른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특히 이 소설에서는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작가의 집요함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위의 구절과 같이 골드문트의 독백을 통해 표현된다. 예술가에 대한 나의 지난 인식과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예술가와 근면, 성실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작가가 던지는 질문 같았다. 지금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예술가에게 근면과 성실의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골드문트도 아직 예술가로서 성숙하지 못한, 막 예술가의 길 출발선에 서 있는 초심자였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예술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구나. 그렇다면 이런 나는 예술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



결국 골드문트는 예술에 복종한다. 조금 더 성장한 것일까? 그 대신 그가 놓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한다.



그는 예술 자체에 복종했다. 예술은 얼핏 보면 정신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 도구와 목재, 흙, 물감, 금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넓은 세상을 만끽하는 자유, 위험을 즐기는 짜릿한 쾌감, 아빈낙도의 자부심을 모두 바쳤다. 그러고도 그는 숨을 죽이고 화를 삭이며 자꾸만 새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이 소설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예술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학문이든 예술이든 결국 바쳐야 하는 제물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상과 성향을 다를 수 있지만 무엇이든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르치스가 한 번도 수도원을 벗어나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는 것, 골드문트가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유로운 방랑을 기약 없이 미룬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했던 나는 성격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방법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영감을 받았다고 하루 만에 휙 써지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물론 재능의 문제와는 별개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성향은 자로 쟨 듯 갈렸다. 나르치스는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골드문트도 처음엔 나르치스의 도움을 받았지만 나중엔 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의 방향은 고민 없이 정해진다. 마치 각자 타고난 숙명이 있다는 듯이. 그런데 정말 인간에게는 숙명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져야만 하는 내재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뚜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런 게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나의 어떤 부분이 지금 나를 쓰고 있게, 읽고 있게 만드는 것 같달까. 그런데 이건 뭐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머리 터지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만큼 다양하고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 외에도 또 감탄할 만한 부분은 묘사다. 특히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부분의 묘사는 정말 세련되고 아름답고 멋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를, 인물들의 나이 듦을 알려준다.




쌀쌀하고 습기 찬 가을바람을 맞받으며 그는 단풍이 물든 경치 속으로 말을 달렸다. 점점 빨리 말을 몰아 대자 말 잔등이 훈훈해지고 자신의 피도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확이 끝난 들판과 휴경지, 쇠뜨기와 갈대숲이 우거진 황무지와 이끼 낀 곳들을 지나 그는 흐릿한 공기를 가르며 숨 가쁘게 말을 몰았다.


11월의 바람이 지붕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여러 부일이 지나갔고, 너도밤나무에 꽃이 핀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우윳빛이 감돌던 연두색 나뭇잎이 어둡게 짙어진 지도 오래였고, 황새가 정문 성탑 위에 둥지를 틀어 새끼를 낳고 날갯짓을 가르친 지도 오래였다.


여름이 갔다. 양귀비와 달구지 국화, 선옹초와 아스터도 시들어 사라졌고, 연못의 개구리도 조용해졌다. 황새도 높이 날아올라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인생의 후반부를 맞이할 때까지 구체적인 나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탁월하고 감각적인 묘사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나이를 짐작하고 점점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가을이 왔다가 겨울이 왔다가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짧은 시간 속에 완벽하게 압축해놓은 작가의 재주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계절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골드문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교수형을 받을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며 그가 느끼는 비참함과 두려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날이 밝아오자 새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골드문트는 새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어떤 소녀가 창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다. 강물이 흐르고 짙은 색깔의 물고기들이 말없이 헤엄쳐 갔고, 바람이 불어 땅바닥에는 낙엽이 뒹굴었다. 별이 총총하던 하늘에 먼동이 터오고, 젊은이들은 무도회장을 향해 무리지어 가고, 먼 산에는 첫눈이 내렸다. 모든 것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들은 기뻐하거나 혹은 슬퍼하면서 생기에 찬 눈을 반짝였으며, 개들이 짖어대고 시골 외양간에서는 소들이 음매 하고 울어댔다. 이 모든 것이 골드문트 없이도 돌아가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이젠 그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는 떨어져 나온 것이다.

골드문트는 벌판에서 밀려오는 새벽 냄새를 맡았다. 그는 갓 숙성시킨 달콤한 포도주와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싱싱한 호두를 맛보았다. 그 모든 다채로운 세계의 기억이 환하게 떠오르면서 답답한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이 혼돈 상태의 아름다운 삶 전체가 가라앉으면서 작별을 고하고 다시 한번 그의 모든 감각을 반짝이게 했다.







이 소설은 크게 보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담겨 있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난 이 둘의 우정이 너무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우정이라고 할까?



결국 이 소설은 나르치스로 상징되는 것들과 골드문트로 상징되는 것들의 합의처럼 보인다. 작가의 금욕 vs 본능? 절제 vs 자유? 학문 vs 예술? 삶 vs 죽음? 등 두 가지 길 위에의 고민과 갈등이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는 과정을 그들의 우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나르치스는 긴 시간이 흐른 후 골드문트와 재회를 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골드문트의 삶을 더욱 존중하게 된다. 골드문트도 마찬가지로 나르치스를 다시 만나 마지막 방황을 끝내고 결국 그의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누구의 삶이 더 옳고 더 나았다고 말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절충과 중도를 찾아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우정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힌트를 주는 것 같았다. 극과 극의 두 인물이 깊고 두터운 우정을 지켜내고 서로의 사상의 간극을 좁혀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나르치스의 생각

물론 수도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과 도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자신의 인생이 더 낫고 올바르며 더 안정되고 정돈되어 있으며 더 모범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은 잘 짜인 질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어김없이 봉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삶이었고, 늘 새로이 명료함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방랑자나 바람둥이로 살아가는 예술가의 인생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더 나은 삶이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어떨까?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단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고, 그리스어를 할 줄 알고, 자신의 감각을 죽이고 세속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과연 인간의 소임일까?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은 애초부터 감각과 충동, 피 끓는 욕망, 죄짓기 쉬운 성향, 쾌락을 즐기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는 성향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수도원장 나르치스는 친구를 생각할 때면 이러한 의문들을 떨칠 수 없었다.



마지막 문장

마지막 이틀 동안 나르치스는 밤낮없이 친구의 병상에 붙어 앉아 친구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드문트의 마지막 말은 그의 가슴속에서 불처럼 타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의 성향, 생각, 사상, 삶을 존중하고 인정했던 두 사람의 우정은 단지 친구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까?






담겨 있는 것들이 많은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소설이었다. 또 그만큼 소설가는 직업이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 다시 한번 그 두껍고 거대한 벽을 느낄 수가 있었다. '대가의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소설이었다.



사두고 아직 읽지 못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어서 빨리 읽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용감한 친구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