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시간의 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고.

by Ann







내 앞에 실의에 빠진 친구가 앉아있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좀처럼 진정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온몸을 떨었다. 그날 날씨가 춥기는 했지만 날씨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지만 일단 그의 얘기를 들었다.



실은 그의 얘기를 전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우리가 그동안 나눈 얘기들이 있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그의 표정, 몇 개의 단어, 몸짓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를 바라봤고, 그의 얘기를 들었다. 동시에 저녁을 먹었다.



얘기는 메뚜기처럼 이곳저곳을 정해진 방향 없이 뛰어다녔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 같았다. 그렇게 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흘러갔다. 눈에 띄게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굳어진 몸과 표정이 좀 풀리는 듯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우러 다녀왔다. 확연하게 달라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럴 때 담배는 아주 큰 효과를 발휘하는 듯했다. 그는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자기가 생각했을 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그가 받은 충격에 비해 꽤 빠르게 정리된 것 같았다. 뭐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쌓은 시간 안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함께 떠올라서가 아닐까. 시간은 점점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다주니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면서 흔적을 남긴다. 마치 유전과도 같았던 반드르르한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건조해지고, 2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영화를 보고 나면 아픈 무릎 때문에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게 되고, 밤을 새우는 것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흰 머리카락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된다. 부모님과의 이별도 한 번쯤 생각하게 될 때 시간을 멈추고 싶어진다. 그 이별을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덜컥 앞선다. 모두 시간이 주는 두려움이다.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전과 같지 않다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의 원인이 시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매일매일이 월요일이어도 좋으니 시간이 머물렀으면 좋겠다. 부모님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 언젠가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이 싫어서

- 내가 어느 날 노트에 쓴 메모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려움을 견디게 하는 것도 시간이다. 시간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내 앞에서 온몸을 떨던 친구와 내가 주고받았던 건 우리가 쌓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사랑, 우정, 신뢰, 추억들이었다. 단지 아픔을 털어놓고 들어준 것으로 그 일이 해결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와 공유하는 것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 친구에게 닥친 일에 대해서만큼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혼나고 대들고 한참 심각했었으면서도 때가 되면 밥 먹으라는 엄마의 한 마디에 못 이기는 척 나가 밥을 먹으면 스르르 갈등이 해결되는 것도 엄마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 그 시간 안에 쌓인 많은 것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땐 몰랐지만 시간이 나에게 많은 것을 겪게 한 후, 내가 연인에게 받은 것이 상처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그런 것들을 깨달아간다. 매일매일 마치 타임 루프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고 허무하고 질리는 일상이지만 그 일상이 우리에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리 하찮은 것들이 아니다. 그 일상은 시간 안에 존재하고 그 시간은 사랑, 우정, 신뢰, 추억, 경험, 깨달음 등을 만들어준다.



내가 가장 두려워함과 동시에 믿는 것이 바로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시간을 공유하고, 기억을 공유하고, 아는 것을 공유하고, 많은 것을 공유하기 시작하면 서로를 연결하는 끈이 점점 더 두꺼워져 끊어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간'이 아니면 만들기 어렵다. 길고 짧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결코 시간을 함께 쌓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계기로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 편일까. 우리를 모두 죽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게 만들고, 많은 것을 두고 떠나게 만드는 시간을 없애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주는 선물을 받고, 힘을 믿으며 잠시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 살다가 가는 것?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매일매일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두려움을 겪어야 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잊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힘은 사랑, 우정, 추억과 같은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주니까. 우리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지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시간의 힘' 덕분 아니었던가.



'소중한 것'이라는 개념도 시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무한하게 존재한다면 그 무엇이 소중하게 느껴지겠는가. 생명도, 순간도 전부 하찮아질 뿐이다.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소중한 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한 건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 시간의 힘을 앞으로 어떻게 발휘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지구를 지켜낼지 궁금해진다. 나는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지만 내가 가진 그동안에 모은 시간의 힘을 발휘해 내 것들을 지켜낼 것이다.





ㅣ영화 정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글이 좋은 일에 쓰일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