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개팅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
다시는 소개팅이든 맞선이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날들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들어온 소개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의 가능성이 99%의 절망감을 덮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흐려지는 나의 기억력도 한몫했다. 인간이 왜 망각의 동물인지 이런 나를 보며 깨달았다.
하기로 하고 며칠 만에 나는 후회를 했다. 이래서 인간은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했던가. 만나서 펼쳐질 모든 일들이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덜컥 모든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옷은 뭘 입나,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나, 만나자마자 우리를 휘어감을 그 어색함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겨울이 원망스러웠다. 추우면 호빵이나 사다 먹을 것이지, 무슨 남자를 만난다고 내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소개팅 남 앞에 앉아있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어색함의 공기는 빨리 사라졌다. 동갑이고 그분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나의 관심사에도 크게 공감해준 덕분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3시간 넘게 다 마신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었다. 목이 따끔거려 더 이상 얘기하기가 힘들 것 같아 내가 그만 일어서자고 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나를 지하철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었고 나는 그분을 등짐과 동시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하, 드디어 끝이 났다.'
이건 상대의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정말 좋은 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만남 자체가 나에겐 노동이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어색함을 극복하고 긴장감을 몸에 감고 상대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내 얘기를 하고 정말 재미있어서 웃은 부분도 있지만 재미없는 얘기에도 웃고. 그리고 돌아서면 엄청 집중하고 일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돌아가는 길 앉아서 갈 수 없는, 사람 많은 지하철 안이 나에겐 세상 마음 편한 장소로 느껴졌다. 그리곤 내가 왜 이걸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지가 떠올랐다. 그제야.
동네에 도착해 친구를 만났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졌다. 맛있는 안주와 달콤한 막걸리 셰이크를 맛보며 그날의 피로를 풀었다. 집에 돌아와 완전히 뻗어버렸다.
다음 날, 휴일 없는 나는 출근을 해 늘 그렇듯 간단한 웹서핑을 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 표지를 발견하고 알아보다가 인터넷 서점을 들어가게 됐고 들어가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을 할까 말까 이건 뺄까 넣을까, 이건 도서관에서 빌릴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그 1시간 동안 엄청 신이 나 있었고 집중하고 있었다. 누가 왔는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1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그냥 잠시 설렜던 감정만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책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것이고,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는 것이 너무 기뻤던 것이고, 그 책들 속에서의 모든 고민들,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저절로 그것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 책들을 주문하고 인터넷 창을 닫으면서 혼자 속으로 나름 비장하게 다짐했다. 내 마음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내 감정을 속이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일은 이제 되도록이면 하지 않겠다고. 소개팅은 하지 않겠다고.
점점 소중해진다. 설렘이란 감정이. 이끌리는 그 감정이. 그래서 앞으로 날 설레게 하는 것, 날 이끄는 것들을 지체 없이 낚아챌 것이라 다짐한다. 앞으로 점점 더 그런 감정이 좀처럼 나에게 나타나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