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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Mar 13. 2017

'말대꾸'라는 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듣고 있는 말 중 하나가 '말대꾸'다. 특히 엄마에게 많이 들었다. 말대꾸한다고 엄청 혼이 났던 기억이 꽤 많다. 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까진 일방적으로 혼이 나고 맞았던 시기였다. 감히 엄마에게 반발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던 나이였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엄마'라는 존재는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그저 엄마 말이 다 맞는 것이고 혼나기 싫고 맞기 싫어서 무조건 따랐었다. 나는 꽤나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였다. 


어느 덧 나는 중학생이 되고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사춘기가 찾아왔다. 키가 컸고, 힘이 세졌으며 아는 것이 많아졌고, 좋아하는 것이 생겼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점점 엄마가 나에게 하는 행동들이 옳지 못하다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매를 들어 나를 때리려 했고, 처음으로 엄마의 팔을 잡았고, 엄마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말이 많은 아이, 말대꾸가 심한 아이가 되었다. 엄마와 나는 일방적으로 혼이 나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꼴이 되었다. 엄마가 나를 꾸짖을 때 내가 억울한 이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얘기하면 말대꾸를 한다고 더 크게 혼이 났고 나는 더 크게 저항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싸우기 시작했다. 자식과 부모가 싸운다는 말이 어울릴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 자식과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기 때문에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가 더 이상 되지 않는다면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식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이 지속됐지만 내가 엄마의 팔을 잡은 이후부터 맞지는 않았다. 아니, 엄마는 나를 때리지 못했다. 


언성을 높이거나 건방진 태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른이 하는 말에 몇 번 이상 의견을 덧붙이면 말대꾸한다고 지적을 당하는 일이 사는 동안 너무 많았다. 나의 직접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에서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 특히 자신의 말이 막히거나 민망한 상황이 되면 더욱 언성을 높이며 말대꾸를 하는 아주 건방진 사람 취급을 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며 그냥 입을 닫고 만다. 그렇게 대화의 창은 닫히고 마음은 점점 멀어져 간다. 


자신 보다 어린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말대꾸가 되는, 특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집에서, 부모님에게서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하고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발언권을 빼앗기는 그런 경험은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눈치 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는 사람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과거의 나는 겉으로 보기엔 안 그렇지만 내적으로는 꽤 많이 주눅 들어 있었고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나의 눈치 보기는 지금은 꽤 큰 장점이 되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연애도 쉽지 않았다. 상대가 조금만 강압적으로 나오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내 의견을 얘기하면 미움을 받거나 상처를 받을 거라는 의식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문제의 원인 중 하나가 '말대꾸' 노이로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말대꾸라는 말이 참 싫다. 말대꾸가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무조건 네 말은 틀려!'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보다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힘이 없는 사람이 힘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때인 것 같다. 그게 참 안타깝다. 나이, 지위 불문하고 의견을 얘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더 좋은 방법이 모색되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인데 말이다. 


얼마 전에도 엄마와 얘기하다가 '어린 게 뭘 안다고'라는 식의 공격을 받았다. 지금은 괜찮다. 이제 나는 성인이니까. 그런 식의 얘기로 주눅이 든다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걸 잘 아니까. 그리고 그것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아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엄마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대화의 창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나도 아직 미성숙하고 착한 딸이 아니어서 그 모든 걸 포용하고 이해하기가 가끔 힘이 든다. 어릴 때부터 금이 간 엄마와의 관계는 늘 붙은 것 같다가도 다시 벌어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다시 받아들였다. 다시 확인했다. 엄마에게 말대꾸라는 말은 서른이 넘은 딸에게 아직도 유효한 단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나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말대꾸'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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