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종이 위에 눌러 쓰는 글

by Ann

김훈 작가님은 아직도 연피로 원고지에 글을 쓰신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엄청 고집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내 추측에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중에서-



감히 이 어어마한 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기가 무척 조심스럽긴 하지만 나도 컴퓨터에 바로 써 내려가는 것보다 종이에 적어내려 가는 것이 더 좋다. 아니 그렇게 쓰여진 나의 글이 좀 더 만족스럽다.


컴퓨터는 표면이 너무 매끈해서 자꾸 글이 미끄러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무언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써져 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종이에 연필 혹은 펜으로 글을 쓰면 느려진 속도만큼 다음 단어를, 내용을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서 좀 더 정성을 들이게 되는 것 같다. 꾹꾹 힘을 줘 내가 생각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쓰면서 벌어지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좀 더 정성스러운 문장이 탄생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일 테지만.


이렇게 펜으로 직접 글을 쓰는 행위가 나 같은 사람에겐 자칫 허세로 비칠 수 있다. 뭔가 있는 척 하기 위한 행동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써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머리가 나빠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나빠서 머리로만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직접 쓰고 박박 지우고 찍찍 긋고 그렇게 움직여줘야 나의 뇌도 움직여주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암산도 못한다. 아주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도 머리 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한 줄 한 줄 종이 위에 적으면서 풀어야만 그제야 정리가 된다.


비록 내가 종이 위에 연필 혹은 펜으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 머리가 나빠서이긴 하지만 그 언젠가 이렇게 글을 쓰는 내가 멋있어 보일 수 있을 정도의 멋진 글을 쓰고 싶다. 머리가 나빠서이긴 하지만 마치 이렇게 글을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죽는 그 날까지 그런 순간이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종이 위에 쓰여진 나의 글씨 하나하나를 이렇게 컴퓨터에 옮겨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