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좋았다. 늘 당연했던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이 이제는 무지개를 보듯 귀하다. 그런 귀한 공기와 하늘이 오늘 얼굴을 드러내 주었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친구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주차장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싣고 온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원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모두들 맑은 하늘을 보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걸었다. 며칠 전 하루 금식을 한 이후로 급격히 체력이 저하된 나였지만 걷고 싶은 날이었다. 공원 한 바퀴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 느린 시간 사이를 우리의 대화로 빼곡히 채웠다.
나의 금식이 성공적이었다는 것, 더욱 가벼워지기로 했다는 것을 친구에게 알렸다. 친구 역시 가벼워지는 중이었다고 했다. 단지 몸무게를 줄이고 외모를 가꾸기 위함이 아닌 몸과 정신 모두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맑은 공기가 나의 생각을 나와 함께 있는 친구에게, 그 친구의 생각을 나에게 전달해준 듯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우리의 발걸음은 반려견 놀이터에서 멈췄다. 반려견을 키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는 늘 남의 개를 훔쳐본다. 오늘 개들도 맑은 공기 귀한 줄 아는 듯 많이 나와있었다. 우리는 놀이터 펜스에 턱을 걸치고 서서 한참을 구경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자주 가는 유기견 카페의 개들하고도 마주쳤다. 뭔가 안쓰러운 기운을 풍기는 개들이라 유심히 봤는데 낯이 익다 했더니 유기견 카페 아이들이었다. 착한 친구들이 아이들을 산책시켜주기 위해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생기발랄한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주눅 들어있고 약간은 꼬질꼬질해 보이던 유기견 카페의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그들을 데리고 온 아이들이 연신 쓰다듬어주고 귀하게 다뤄주고 있어서 마음이 좀 놓였다. 모두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몸이 식어 추워질 무렵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전에 우연히 들렀다가 반해버린 그 집을 또 찾았다. 신선하고 푸짐한 채소와 감칠맛 나는 반찬들과 무한리필 칼국수까지. 사실 메인 요리는 낙지, 제육볶음이었는데 반찬과 칼국수에 더욱 손이 가는 집이었다. 물론 메인 요리도 맛있었다. 신선하고 푸짐한 채소를 잔뜩 먹으니 괜히 건강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덤으로 간에 좋은 차도 준비되어 있다. 내 친구는 두 잔이나 마셨다. 어제 새벽 3시까지 달렸다면서.
밥을 먹고 나와 입가심으로 커피를 샀다. 늘 그렇듯 내 친구는 벤티 사이즈로, 나는 숏 사이즈로. 키 차이만큼 커피 사이즈도 차이가 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커피를 사들고 나오니 아주 살짝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공원을 통과해 성당으로 가는 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색감의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연신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그때 마침 우리를 더욱 설레게 한 건 그 노을 진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출현이었다. 비행기만 보면 설레는 마음이 조건반사로 뭉게뭉게 올라온다. 여행도 많이 못 가봤으면서.
성당에 들어가기 전 성물 가게에 들렀다. 친구가 나의 대녀로 다음 주에 세례를 받아서 내가 미사보와 미사보 주머니를 선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우여곡절 끝에 겨우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내가 대모를 해줄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친구는 옷 입어보듯 여러 미사보를 써보고 굉장히 특이한 디자인으로 된 것으로 골랐다. 나도 아직까지 대모를 해준 친구가 선물한 미사보와 미사보 주머니를 쓰고 있다. 세례 받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용서받고, 정말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그 뭉클한 기분을, 또 신부님께서 미사보를 씌워 주시던 그 성스러운 느낌을. 내 친구도 곧 그걸 느끼겠지. 그때 내가 선물한 미사보가 함께 하겠지.
친구는 나에게 묵주를 선물해주었다. 미사를 보고 함께 훈훈한 신부님께 축성을 받았다. 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묵주 위에 신부님의 축성이 내려지면서 뭔지 모를 힘도 함께 그 묵주 안에 담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게 종교의 힘일까. 아직은 날라리 신자이지만 이럴 때 종교를 갖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의 마음과 신부님의 축성이 담긴 묵주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성모 마리아 상에 걸어놓았다. 이미 여러 개의 묵주가 걸려 있었다. 세례 받은 날 선물 받은 것과 내가 산 묵주들이 먼지 아래 걸려있었다. 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잘 정리해 친구가 준 묵주와 함께 걸면서 단지 종교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 주변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주는 친구의 세례식이 있다. '세례식을 잘 끝마칠 수 있도록 해주세요'가 나의 첫 기도 내용이 될 것 같다. 나에게는 첫 대녀가 생기는 순간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