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호감은 숨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느낄 수 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혹은 '아, 저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성별, 신분, 국적 등등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그 감정은 평등하고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단어는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없듯이. 진짜 사랑은 '하지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더 어울린다.
그리스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고, 그 위기는 평범한 그리스 시민들, 또 그리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그 가운데서도 곳곳에서 사랑은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다. 시리아에서 온 이방인 청년에게도, 스웨덴에서 출장 온 냉정한 커리어 우먼에게도, 독일에서 온 역사학자에게도, 이제 다 끝이라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노년기 여성에게도 사랑의 감정이 피어난다. 어떻게 보면 피해갈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이란 씨가 언제 어디에서 꽃을 피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니까.
이 영화는 그런 사랑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민자를, 자신과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나타난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꽃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잘 자랄 거라고 생각한 꽃이 환경에 따라 살기도, 죽기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시들어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끝내 활짝 피기도 한다.
모두 결말이 다른 사랑이지만 세 커플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랑에 찾아오는 각종 방해물, 장해물들을 뛰어넘으려고, 피해보려고, 견뎌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역경과 고난을 무릅쓰고 하는 사랑 외에 사랑이라 착각하는 사람의 모습도 보여준다. 바로 첫 에피소드 <부메랑>에 등장하는 대학생 딸을 둔 남성인데 그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를 한 가장이다. 그는 그 모든 실패를 경제 위기와 이민자들의 탓으로 돌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민자들을 모두 잡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무리들은 이민자들에게 폭력을 가해 쫓아내려 하며 살인도 저지른다. 그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나라를,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불행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그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끝내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른다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소유하려 한다거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닌데 말이다. 결국 자신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은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수 있다. 돌아오는 부메랑을 막을 길은 없다.
<부메랑> <로세프트 50mg> <세컨드 찬스> 이렇게 세 가지 사랑 이야기는 다르면서도 같다. 상황, 나이, 국적 등이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다 비슷하다.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서로를 찾는 눈, 서로를 향한 미소와 웃음소리,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노력들이 그들 모두에게서 보인다. 특히 커플들이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데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결코 그들에게 그것이 장애가 되지 않는 면이 인상 깊었다.
오히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결국 노력이란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서로 말이 안 통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 하지 않아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세컨드 찬스>라는 에피소드에서 세바스찬과 마리아의 사랑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다른 커플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크게 불편하지 않지만 이 커플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말이 안 통한다. 독일에서 온 세바스찬은 그리스어를 아예 못 하고 그리스 인 마리아는 독일어 물론 영어도 많이 서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상대가 전달하려는 것을 느끼려, 천천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려 노력한다.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이 커플의 결말에서 보여주는 두 사람의 포옹과 눈물은 우정을 포함한 다양한 사랑이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전달하는 데 있어 결코 언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말없이 다가가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충만하게 그 감정이 표현되고 전달된다는 것을 그 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때 잠시 친구 아버님 장례식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냥 손을 꼭 잡고 함께 울었던 그때. 그때의 진짜 감정이 떠올랐다. 그 어떤 위로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서로가 그렇게 위로를 주고받았던 그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올라오는 걸 참느라 혼났다. 그냥 울어도 되는데 왜 참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내레이션의 내용은 사랑의 신 에로스와 그의 아내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이다. 에로스와 프시케가 사랑의 결실을 맺고 딸 플레져(Pleasure 기쁨)를 낳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강조한다.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기는 그럼에도 끝까지 에로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했던 프시케를 어여삐 여긴 제우스는 에로스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설득해 중재하고, 인간인 그녀를 불멸의 존재, 즉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J.K시몬스의 멋있는 중저음 목소리로 이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면서 사랑의 힘에 대해 강조한다.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결국 사랑이 이긴다고.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사랑의 의미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사랑으로 인해 용기 내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사랑의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 사랑이 결실을 맺었건 맺지 않았건 그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사랑을 통해 어떤 것들을 겪었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종종 잊곤 했다. 진짜 사랑의 힘에 대해서. 나에게 사랑은 단지 드라마나 영화, 문학 속에만 존재하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나 또한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아무리 잊어버려도,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무리 무시하려고 하더라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이 존재하기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거라고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면서 이 영화가 무척이나 로맨틱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미장센들이 쏟아지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영화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겐 참신하게 다가올 영화인 것 같다. 마치 각기 다른 세 줄기의 강물이 마지막에 큰 강에서 만나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화를 끝내지 않고 반전 아닌 반전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배우 J.K 시몬스의 새로운 모습도 이 영화의 즐길 만한 요소이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따뜻했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포옹과 눈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 나 또한 그 부분에서 크게 위로받았다. 그 기운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내 몸에 남아있었다. 그 따뜻했던 기운이.
사랑 앞에서 용기 내지 못 하는 사람들,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 핑계 대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위로받고 용기 내고 비겁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말이야 어찌 됐든 사랑하시라고 세게 등 떠밀어주는 영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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