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아닌 저곳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행방불명이 된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2장으로 넘어가면 그 남자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곤충 채집을 하러 길을 나섰고, 어떤 모래 구멍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얘기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보면 판타지 같기도 했다. 사막이 아닌데 사막과 같은 마을에 사람이 살 만큼 큰 모래 구멍. 그 안에 살고 있는 여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래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퍼내는 사람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을과 상황. 이게 판타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판타지 안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마침내 인가가 끊어지자, 사방은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이었다. 땅도 발바닥에 달라붙을 것처럼 고운 모래땅으로 바뀌었다. 군데군데 메마른 들풀이 움푹 파인 모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가다 보면 반 평 정도 되는 보잘것없는 가지 밭이 무슨 실수처럼 나타나곤 하였지만, 사람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해리가 벽을 통과해 호그와트 학교로 들어서 듯 주인공 니키 준페이는 모래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마치 주인공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꿈의 내용은 어떨 때는 악몽, 어떨 때는 엉큼한, 어떨 때는 안도감이다. 그렇게 꿈처럼 내용이 휙휙 바뀌고 그때마다 나의 감정도 바뀐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쥘 만큼 마음 졸이기도 하고, 물을 마시고 싶을 만큼 답답해하기도 하고,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여자 혼자 살고 있는 기묘한 모래 웅덩이의 집에 갇히게 된 니키 준페이는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 탈출 계획과 그 계획들을 실행하는 과정들이 마치 영화 <캐스트 어웨이>나 <마션>이나 하정우 주연의 <터널> 등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영화 같다고 생각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이미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었다. 그의 여러 계획들과 그 계획들을 실행하는 과정들, 그 과정에서 그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것들이 모두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독백과도 같은 문장들도 말이다.
한동안 모래를 파내기에 열중한다. 모래는 순종적이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모래에 파고드는 부삽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이 시간을 새겼다. 그러나 마침내 피로를 느낄 팔이 무슨 경고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꽤 팠다고 생각했는데 성과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늘 파낸 모래 바로 위에 있는 미미한 부분뿐이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저 단순한 기하학적 과정과는 어딘가 몹시 어긋나 있다.
불안이 더 이상 증폭되기 전에 휴식을 취하며 구멍의 모형을 만들어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재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처마 밑 그림자를 골라 50센티미터 정도 파 내려가 보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측면의 경사가 머릿속으로 그린 각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고작해야 45도...... 입 벌린 사발 정도이다. 바닥 쪽에서 긁어내자, 사면을 따라 모래가 흘러내리는데 경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무래도 모래에 안정 각도 비슷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입자의 무게와 저항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금 그가 도전하려는 이 벽 역시, 그 정도의 경사일까?
그의 탈출 계획은 모두 실패한다. 아픈 척을 하면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까 싶어 몇 날 며칠을 누워 지내보기도 하고, 그냥 미친 듯이 고함을 쳐보기도 하고, 같이 있던 여자를 포박하고 웅덩이 밖에 있는 사내들을 협박해보기도 하고, 몰래 만든 올가미를 올려 겨우 성공하는가 싶더니 모래 늪에 빠지는 바람에 오히려 그들에게 구출되어 다시 갇히고 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듯싶었는데 어느새 그는 그 환경에 익숙해졌고, 함께 있던 여자와 추억이라면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곁에 있는 여자와 모래 웅덩이가 익숙한, 살만한 것이 되어갔다. 매일매일 모래를 퍼내고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고 섹스를 한다. 이 좁고 답답한 모래 웅덩이에서 넓고 쾌적한 그 어딘가로의 탈출을 꿈꿨지만 살다 보니 그곳이 그의 공간이 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유수 장치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곳이 그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미루고 만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어릴 때 나의 꿈을 떠올린다. 그 꿈을 나는 어른이 되면 당연히 이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내 삶에 더해질수록 그 꿈과는 멀어져 갔다. 더 큰 세계로 진출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더 큰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들을 했지만 좀처럼 나에게 현실을 탈출할 로프는 내려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미 큰 세계에 진출해 남부러울 것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친구들, 또래들을 보면서 조금 더 발버둥을 쳐봤지만 결국 능력 부족으로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땐 그런 나를 미워했고 원망했다. '너는 왜 저들처럼 되지 못했니. 너는 왜.'
하지만 길고 긴 시간들이 쌓여 나의 공간, 나의 사람, 나의 일들이 생기면서 나는 안주 혹은 만족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어서, 익숙해져서, 진짜 만족스러워서.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세계이고 그 안에서 나름의 만족과 행복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넓고 큰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조금씩 보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는 거지? 그럴 필요 없잖아."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걸어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가끔 주변 어른들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포부가 없냐고. 큰 꿈이 없냐고. 열정이 없냐고. 그때 나는 속으로 되묻는다. 그런 꿈들, 그런 포부가 지금 당신의 삶에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나요? 저는 지금으로도 행복한 걸요? 큰 꿈이 없어도, 큰 포부가 없어도, 큰 꿈을 이루지 못했어도, 큰 세계로 나가지 못했더라도 문득문득 괴롭고 문득문득 행복한 걸요?
훗날 니키 준페이는 그곳을 탈출했을까? 나의 상상 속에 그러면 그 웅덩이 안에서는 나오지만 그 마을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갈 수 있지만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유수 장치를 더욱 연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모래를 퍼내면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일탈을 잠깐씩 꿈꾸면서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들을 채워가는 우리들처럼 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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