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쓰다

나의 첫사랑 이야기

by Ann



그땐 몰랐다. 그 한가운데 있을 땐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나와 내려다보니 보였다. 나의 첫사랑이. 생각지도 못했던 첫사랑이. 그 아이가 나의 첫사랑이 될 줄 나는 몰랐었다. 내가 이제와 '첫사랑'이라고 그 아이와 나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은 첫사랑은 다른 사랑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농도 짙은, 진한 무언가가 아닌 파스텔 톤의 색감을 내는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에 가깝다. 첫사랑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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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와 난 고등학교 때 친해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나의 친한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아인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친구와 잘 되게 도와달라고 했다. 내 친구를 계기로 우린 자주 만났다. 자주 연락했다. 내 친구 얘기로 시작해 수많은 갈래의 이야기의 길을 걷다가 겨우 빠져나오곤 했다.


내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 아이를 처음 만나 이야기 나눈 곳은 우리 집 앞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비가 왔었다. 그 아이는 늘 운동선수처럼 입고 다녔다. 검은색 캡 모자에 후드티를 걸치고 나타났다. 유난히 어깨가 넓은 아이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얘기를 나눴다. 정확하게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장면에서 나와 그 아인 시종일관 웃고 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내용은 그 아이가 내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날 만남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중학생 때 수학 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별것 아닌 사실이었지만 우린 신기하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나눴다. 별것 아닌 우연이 우리의 거리를 더욱 좁혀주었다.


공부도 못하면서 독서실은 무척 열심히 다녔던 나와 그 아이는 독서실 앞에서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친구와 그 아이가 만난 시간보다 나와 그 아이가 만난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독서실 앞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그 아이의 꿈은 검사였다. 그 당시의 성적으로는 둘 다 턱도 없는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꿈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네가 검사가 되면 내가 근사한 양복 한 벌 사줄게~!"
"진짜? 고마워~!!"
실제로 그 아이는 검사가 되지 못했다. 아니, 되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 그 아인 그 당시 또래들보다 훨씬 성숙한 아이였다. 그래서 내가 정말 참 좋아했다. 이성으로서가 아닌 인간적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도 깊고 매너와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다. 나는 그때의 그 아이에게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성인이 된 이후 나의 연애 안에서 나는 늘 그 아이였다. 아니, 그 아이처럼 하려고 했다. 그 아이가 나에게 베풀었던 많은 것들을 나의 연인에게 그대로 베풀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을 가는 날이었는데 내가 아침에 늦잠을 자버렸다. 지각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왜 안 오냐고. 내가 늦잠을 자버렸다고 어떻게 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더니 자기가 다 해결하겠다고 어서 준비하고 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우리 담임 선생님께 내가 아파서 지금 못 오고 있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던 것이다. 그 아인 선생님들께 신뢰가 있었던 터라 다행히도 선생님께선 그 말을 믿어주셨던 것 같다. 아님 그냥 속아줏셨던 것이거나. 어쨌든 난 그 아이 덕분에 혼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늘 부족한 나 때문에 이것저것 해결하느라 애를 많이 썼음에도 한 번도 생색을 내거나 나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는 아이였다. 오히려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걸어가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먼저 해주는 아이였다.


그 아이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내 친구와 잘 되게 해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내 친구와 잘 지내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친구의 마음이 좀처럼 활짝 열리질 않아 나와 그 아인 함께 마음고생을 했다. 그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꽤 끙끙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지만 그 마음이 정말 순수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그 둘의 관계를 위해 애썼다. 둘 다 참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애틋함보다는 풋풋하고 순수한 감정으로 서로를 대했던 것 같다. 사실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나중에 성인이 되면 꼭 집을 하나 얻어서 룸메이트 하자고 약속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정말로 그 아이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약속인데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아직도 그 아이를 떠올리고 나의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했고, 그런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 아이와 내 친구는 잘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우린 계속 연락을 했다.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전화로 그 역할을 대신하곤 했다. 그 친구의 첫 자취방도 구경가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네가 나중에 나이를 먹게 되면 알게 될 거야.'라는 문장을 이메일에 남긴 채 나에게서 도망갔다. 도망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그를 쫓았기 때문에. 하지만 좀처럼 그 아일 다시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찾아야지 단념하고서도 나는 그 아이를 그리워했다. 그 아이의 그림자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형체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말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조차 시간이 흐르고 흐르자 사라졌다. 점점 그 아이를, 그 아이가 나를 떠난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다른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그 아이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망설이지 않고 그 아이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혹시 지금쯤이면 그 아이도 나처럼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나를 보는 게 이제 불편하지 않겠지? 답장이 왔다. 얼굴 한 번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만났다. 그런데 그 아인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외모, 성격, 생각 모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늘 상상했던 그 아이의 미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세월이 우리에게 준 간격 때문에 느끼는 낯섦이 아니었다. 정말 다른 사람 같아서 느끼는 낯설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은 컸지만 그게 다였다. 그 친구도 나의 그런 마음을 느꼈던 걸까. 그가 돌아간 이후 우린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겨우 닿게 된 그 친구와의 끈인 연락처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의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이 차갑게 식은 커피처럼 쓴맛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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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간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저 깊은 곳에 살고 있는 그 아이만 떠올린다. 이제 나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로 인해 그 아이는 완벽하게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순수하고 풋풋했던, 사랑과 우정이 뒤섞인, 다시는 느껴볼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 되었다.


오늘따라 그 친구가 보고 싶다. 나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그립고, 그때의 깨끗하고 순수했던 감정이 그립고, 가장 나답던 시절이 그립고, 그 안에 추억으로 남아 있는 나의 첫사랑, 그 애가 그립다. 하지만 그리움에서 빠져나온 현실은 쓰기만 하다. 그 시절이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쓴맛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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