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난해한 영화를 보는 나의 태도

나이트 오브 컵스를 보고

by Ann


1. 난해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딱 처음 드는 느낌이.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지 않았다면 나는 마치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서 있는 것처럼, 깨고 싶은 꿈에서 깨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해서 끝내 자리에서 일어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나의 답답함이 이 영화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릭은 어쨌거나 영화 후반부에 잠에서 깨어나니까. 나는 그의 꿈속에서 함께 방황했던 것일 수도 있다.



2. 테렌스 맬릭 감독. 나는 이 감독의 이전 작품을 본 적이 없는 관객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본 이 영화는 뭔가 좀 과잉됐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내레이션의 내용이나 쇼트의 순서나 영상이 나처럼 무식한 관객에겐 너무 낯설었다. 낯설어하는 관객에게 그 어떤 친절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내레이션, 대사의 내용은 뭔가 앞뒤 없이 심오했고, 뚝뚝 끊기는 각각의 쇼트는 나의 감정도 함께 뚝뚝 끊어버렸고, 흔들리고 불안정한 영상은 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쇼트 하나하나를 끊어서 본다면 뭔가 멋진 영상 같고, 내레이션과 대사 한 줄씩만 읽어본다면 뭔가 심오한 것 같지만 아마도 나는 그것들을 이해하고 테렌스 맬릭 감독과 소통할 수 있는 관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느낌이 그의 연출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글쎄, 난해하지만 이해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는 나에게 후자인 것 같다.



3. 배우들의 이름만 보아도 보고 싶을 것 같은 영화지만 결코 그들의 연기 앙상블을 볼 수는 없다. 배우들이 굉장히 기능적으로 보였다. 그저 그 영상 속에 필요한 도구 정도. 그저 화보 영상 같달까. 크리스천 베일은 거의 대부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여자들이 계속해서 바뀔 뿐이다. 케이트 블란쳇, 나탈리 포트만은 이름이 크게 내세워지긴 했지만 거의 조연에 가까운 시간 동안만 등장한다. 물론 등장 시간만 가지고 주연이다 조연이다 나눌 수는 없지만 그녀들의 이름을 보고 이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라면 나는 말리고 싶다. 보고 싶은 만큼 등장하지는 않으니까.



4. 타로 카드와 연관을 지은 연출은 흥미로울 수 있지만 미리 알고 보지 않는다면 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이 영화의 제목도 타로 카드 중 하나다. 왕이 컵을 쥐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인데 제목과 영화의 내용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내가 참 무식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상황과 취향인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꿋꿋하게 쓴다.



5. 잠깐 검색을 해 알게 된 정보에 의하면 전체적인 줄거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고, 대부분 즉흥적이고 정해진 대본 없이 촬영을 이어나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답답함과 난해함이 (내가 무식해서 느끼는 답답함 말고) 전혀 근거가 없는 감정은 아니다.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다. 이해 못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6. 영화든 문학이든 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갖는 감정, 생각을 체험하게 하는 듯한 작품은 좋지만(위플래쉬나 언더 더 스킨과 같은) '너희가 알아듣든 말든 난 상관없다'라는 식의 작품은 좀 거부감이 든다. 이 영화가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영화적이고 예술적이라고 말하기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이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쓰일 많은 똑똑한 영화 관객들의 작품 해설을 난 기다릴 수밖에 없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쭈뼛쭈뼛 다가가 관찰할 여지가 조금 남아 있었는데 이 영화는 다가갈 엄두조차 나질 않으니 말이다.



7. 내가 테렌스 맬릭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보고, 좀 더 영화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전반적인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면 이 영화를 달리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래도 아니었을 것 같다. 앞에서 실컷 떠들었듯이 단지 어렵고 난해해서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끝까지단 한순간도 졸지 않고 이 영화를 붙들고 있었던 나에게 격려해주고 싶다. 어려워도 난해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영화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진지했던 나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