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마침내 카뮈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에 힘입어 <이방인>을 다 읽었다. 숙제처럼 느껴졌던 책인데 기분이 좋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그런데 한 편으로는 내가 문학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은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 소설은 보물 찾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동안 너무 일차원적인 것들만 느껴오지 않았나 싶다. 그것을 피해 가기 위해 노력을 해오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높고 높은 큰 산 같은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아마 앞으로 고전 읽기에 도전하는 내내 느낄 테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이자 작가인 이동진 평론가가 언젠가 영화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이야기 즉 줄거리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고 했었다. 나는 그 말에 무척이나 공감했다. 영화적인 어떤 것들을 다 제쳐두고 이야기의 매끄러움 혹은 특별함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된다. 많은 요소들은 뒤로한 채 줄거리가 별로면 그 영화는 별로가 된다. 나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영화 관련된 책이나 영상도 많이 보고, 영화를 본 후 꼭 나만의 시선으로 글도 쓰는데 좀처럼 늘지를 않는 느낌이다. 결국 나에게 이야기만 남는다. 그건 내가 영화의 많은 흥미로운 부분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게 참 안타깝다.
아마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야, 더 많이 보고 보아야 달라질 것이다. 그만큼의 여유가 생기겠지. 그렇게 점차 변해가는 나의 시선을 느끼면 무척 즐거울 것 같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소설의 줄거리에만 몰입하여 따라가게 된다. 짧게 한두 줄로도 요약되는 줄거리만 따라갔다고 생각하면 소설을 다 읽은 후 참 허무해진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죽었고, 장례식 이후 별다른 변화 없는 삶을 살던 주인공 뫼르소가 어느 날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 후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것이 이방인의 줄거리인데 그저 이 이야기만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주인공이 사형 선고를 받고 끝나는 것이 그렇게도 허무할 수가 없다. 아니, 그래서 뭐? 하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은 그렇게 공부하듯이 읽었다. 고전 읽기 도전은 나에게 공부의 일환이다. 한 달에 한 권으로 정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천천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으려고. 첫 느낌은 '읽는 데 어렵지는 않다'였다. <시지프 신화>는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느껴졌는데 <이방인>은 그렇지 않았다. 술술 잘 읽혔다. 하지만 이야기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강렬한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에 비해 나른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읽는 내내 이게 왜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것일까 계속 나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인 것 같니? 왜?
작품 해설까지 모두 읽고 보니 그 나른함 조차도 작가의 의도였다. 그가 구상한 소설의 형식이었다. 1부와 2부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부가 무심하고 나른하고 2부는 좀 더 활발하고 생생하고 격양된 느낌이다. 1부에서는 객관적인 외부의 사실 위주로 묘사한다면 2부는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소설 전체, 1부와 2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죽음'이다. 그것을 알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그런 의도와 의도를 표현하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평가할 정도의 실력도 안 되는 나이지만 내가 느낀 그대로가 작가의 의도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그저 이야기가 늘어진다,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지루함과 늘어짐 마저 작가가 의도한 거라면 그것을 그렇게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그제야 나도 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음'의 존재가 나에게 주는 것들. 그 나른함, 의욕. 나에게 죽음의 존재는 절망이 아니라 늘 희망이었다. 내가 죽음 바로 앞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자주 죽음을 떠올린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는 나는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죽음, 혹은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한다. 죽음이 너무 과격한 표현이라면 병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어떤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 때문에 열심히 관리를 한다. 그 일환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갈 때마다 희비가 엇갈린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건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모든 것이 나른해진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걸음도 느려지고 느긋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일들도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아둥바둥하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공부를 하고 다시 본 <이방인>에서 나는 비슷한 것을 느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주인공 뫼르소가 보인 행동들이 그랬다. 1부 전체가 그랬다.
건강한 상태다, 조금 위험한 상태다, 조금 지켜봐야 하는 상태다, 하는 소식들을 들으러 병원으로 가면 수많은 환자들이 그 생활이 익숙한 듯 그곳을 돌아다닌다. 그중에 괴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진료를 받기 위해 진료실 앞으로 가면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우르르 앞만 보고 앉아 있다. 진료를 받으러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습지만 '인생 뭐 있나?'다.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나의 경험과 생각을.
나는 뫼르소에게서 그런 나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존재에게 영향을 받고 있던 뫼르소는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1부의 뫼르소나 현재의 나나 둘 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아니다. 바로 코앞에 죽음이 당도한다면 그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나는 병원을 통해,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을 뿐 진짜 죽음을 실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죽음을 맞닥뜨린다면 나 또한 2부의 뫼르소처럼 변할 것이다. 그 허무함이 간절함으로, 그 나른함이 생생함으로 변할 것이다. 그제야 살아볼 만 할 것 같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 주는 선물일까. 비극적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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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을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당장 죽음 앞에 놓여있지 않지만 이와 같은 죽음을 다룬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영화를 보면 어지러웠던 마음은 조금 평안해지고 그 평안함에서 힘을 얻은 약간의 열정을 느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결코 피하지 않는다. 죽음에 관련된(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책도 여러 권 읽었고 읽을 때마다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결국 죽음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말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이나 가족들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이런 내용의 소설인 줄 전혀 모르고 보았지만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의 소설 속에서도 나를 발견하다니.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다음 고전 읽기도 그의 작품으로 할까 한다. <페스트>로 할지 전에 읽기 힘들었던 <시지프 신화>를 다시 한 번 읽어볼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