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필요한 이유

by Ann

매년 여름이라고 특별한 휴가를 계획하지는 않는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여행이나 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에 익숙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만한 추억들이 있는 것은 이런 나를 끌고 가주는 친구 덕분. 이번 여름도 특별한 계획 없는 나에게 짧지만 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고의 휴가를 제안해준 친구 덕분에 즐거운 추억 하나를 또 만들었다.


동대문에 있는 새로 지은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작년에도 코엑스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었다. 더없이 좋은 휴식이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호텔이라는 장소는 공항과 비슷하게 여행 온 느낌을 맘껏 느끼게 해준다. 호텔 입구를 들어서면 큰 캐리어와 함께 서 있는 여행객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마치 나도 여행을 온 것처럼 설렌다. 체크인을 하고 키를 받으면 정말로 내가 이곳에 여행 온 기분이 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향할 때 두근두근한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라 새것의 냄새가 난다. 좋은 향기는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괜히 설레게 만드는 냄새.


우리가 묵을 객실은 17층에 있었다. 17층에 내려 복도를 지나 드디어 우리가 묵을 객실 앞에 섰다. 문이 마음에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주 멀리서 온 것도 아닌데 고작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온 것뿐인데 침대에 눕고 싶어졌다.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뜨겁다 못해 녹아내릴 것 같은 바깥 풍경이 창문으로 보였다. 하늘이 무척 맑았다. 안이 시원하니 마치 가을이 된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뻐서 사진을 찍고 잠깐 둘러본 후 침대에 누웠다. 시원하고 푹신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음료와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끈적거리는 몸을 씻고 잠시 책을 읽었다. 책을 한 보따리는 가져가고 싶었지만 짐이 많으면 힘들 것 같아서 리디북스 프로 하나로 대신했다.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읽었다. 그의 글이 뭔가 통쾌했다. 지난번에 이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어 그의 다른 작품 <한국이 싫어서>를 워터푸르프 책으로 예약 구매를 했는데 그 책이 발송됐다는 문자가 왔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가지고 왔을 텐데. 돌아가면 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간단하게 먹고 마시러 19층 라운지로 갔다. 우리는 시간에 딱 맞춰 나왔는데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 뷔페에 오면 다시 내가 여행객이 된 기분이다. 외국인들도 보이고 연인들도 보이고 가족들도 보인다. 친구는 화이트 와인까지 한 잔 들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맥주를 가지고 왔다. 잔을 부딪히고 마시고 먹었다. 서로 보지 못한 시간들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재밌는 얘기들도 있고 충격적인 얘기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저 웃으면서 흘려보낼 수 있는 얘기들이었다. 늘 빠지지 않는 다이어트 얘기도 했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건강하게 하자고 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시간이 마감되어 방으로 올라와 짐을 챙겨 야시장을 구경하러 나갔다. 열기가 낮보다 조금 식은 듯했다. 해가 지고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오니 여행 와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외국인들도 많아서 더욱 그랬다. 야시장에서 별로 볼 게 없어서 어슬렁거리는데 우리가 미리 주문해둔 음식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와 급하게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떡볶이와 만두를 주문했다. 서울에선 주문할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이 우리 동네보다 훨씬 많았다. 이럴 땐 서울 사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시킨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가 씻고 드라마를 보며 떡볶이와 만두, 캔 맥주, 과자를 먹었다. 에어컨이 나와 시원했다. 시원하게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에어컨 없는 집에서 푹푹 쪄지고 있을 동생과 뚜이가 생각났다. 얼마나 더울까. 주문한 에어컨은 아직 더 있어야 오는데...... 진작 살 걸 하는 후회가 다시 한 번 밀려왔다. 에어컨이 도착하려면 3일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날은 더욱 더워졌다. 아프리카 보다 더 덥다는 한국. 겨울엔 히말라야보다 추웠다던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다. 여름에도 웬만하면 크게 더위를 못 느끼던 나였는데 이제 덥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맛있는 것을 먹으니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휴가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하루 이틀 자유를 선물하는 건 참 좋은 것 같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하고,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고, 걱정을 잠시 멈추는 시간.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휴가는 그런 시간을 선물해준다. 당당하게 쉴 수 있는 시간들. 평소에도 그럴 수 있으면 좋지만 쉽지가 않다. 현실로 돌아오면 그럴 마음의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가 않는다. 그래도 되는데 못 하는 것들도 있고 그러면 안 되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휴가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실컷 먹고 잠이 쏟아져 각자의 침대로 갔다. 티비를 틀어놓고 취침 예약을 한 뒤 잠을 청했다. 친구는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고 나는 보지 못한 <나 혼자 산다> 재 방송을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시원한 밤이었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8시에 조식을 먹기 위해 7시 30분에 맞춰놨는데 결국 알람을 꺼버리고 8시에 일어났다. 세수도 안 하고 조식을 먹으러 올라갔다. 여행의 꽃은 조식이라고 생각한다. 호텔 조식은 나에게 여행의 대명사와도 같다. 어릴 때 처음 가 본 유럽 여행의 기억이 그렇게 만들어줬다. 아침 8시에 좀처럼 뭘 못 먹는 나이지만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좋아 꾸역꾸역 일찍 일어나 조식을 챙겨 먹는다. 탁 트인 큰 창문 앞에 앉아 조식을 먹었다. 나에게 그 순간 그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멀리멀리로 떠나온 여행지였다.


역시나 뭘 별로 먹지는 못한 채로 방으로 돌아와 좀 쉬다가 아쉽지만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날씨 덕분에 내가 동남아 어딘 가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명동으로 가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갔다. 먹고 놀기만 했는데 집에 가니 잠이 쏟아졌다. 뚜이와 한바탕 인사를 하고 푹푹 찌는 집 소파에 누워 선풍기를 틀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데도 잠이 쏟아졌다.


한참 자다가 더워서 깼다. 눈을 뜨자 더운 우리 집 소파 위였다. 마치 어제와 오늘의 달콤한 휴가가 꼭 방금 꾼 꿈같았다. 시원한 호텔 방에 있던 내가 어느새 다시 더운 우리 집 소파에 누워있었다. 덥지도 않은지 나를 따라 곤히 자고 있는 뚜이가 있는 우리 집이었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참 꿈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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