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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Sep 05. 2018

멋진 사람의 멋진 위로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백작>을 읽고


바람이 시원하다. 햇살이 내 살갗을 따갑게 괴롭히지만 선선한 바람이 달래준다. 이래서 가을이 너무 좋다. 


매일 똑같은 길로 출근을 한다. 똑같은 길, 똑같은 신호등, 똑같은 가게들이 어김없이 인사를 한다. 오늘도 안녕! 하지만 하늘 만은 늘 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본다. 오늘은 맑음. 


일터에 도착하면 커피를 탄다. 아직까진 쨍그랑쨍그랑 커피에 얼음을 떨군다. 짧은 거리지만 걸어오다 보니 목이 타는데 방금 탄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이 소리를 내는 듯하다. 캬. 시원해.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전원을 누른다. 완전히 켜지는 동안 음악을 튼다.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어볼까? "클로버, 피아노 연주곡 들려줘." "피아노 연주곡입니다" 가사 없는 음악을 자주 듣는다. 특히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 


하기 싫은 일 먼저 처리하고 이렇게 글을 쓴다. 매일 같은 길로 출근을 하고 매일 같은 장소에 앉아 있지만, 매일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또 매일 같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랑하는 가족이, 메신저로 수다를 떠는 친구들이, 지혜의서재에 드문드문이지만 노크해주는 이들이,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은 일들이 매일매일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하다. 


한편으론 너무 작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나의 발이 닿는 곳은 집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 도서관 오가는 길, 자주 가는 동네 카페 오가는 길 정도. 아주 가끔 조금 멀리 나가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날. 마치 어떤 작은 성 안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의 활동 범위는 늘 좁았다. 


그래도 괜찮을까. 나는 좋은데, 나 스스로만 만족하는 것 아닐까.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 괜찮아, 아니야 안 괜찮아 반복했던 나날들. 뭐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경험해보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여행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또래 친구들처럼 많은 곳들을 여행하고 느끼고 싶은데 용기가 잘 나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혼자 버스도 잘 못 타는 아이였다. 대학교에 들어가 친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나는 그제야 조금씩 성장했다. 혼자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지고, 혼자 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어딘가 멀리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 가끔 나를 데리고 다녀주는 친구가 있어 열심히 따라다닌다. 언젠가 한 번 용기를 내어보리라 다짐하지만 늘 그 다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쉽다. 많이 아쉽다.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더 많은 글도 쓸 수 있고 더 많은 사진도 찍을 수 있는데. 더 넓고 깊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이 가끔 나를 괴롭힌다. 막상 가지도 못하면서. 


그런 고민들이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면서 일정 부분 해소가 되었다. 멋있는 사람, 로스토프 백작을 보면서. 그의 삶을 보면서. 





러시아에서 평생 호텔에 갇혀 지내야 하는 종신 연금형을 받은 로스토프 백작. 이 소설은 모두 그가 갇혀 지내는 메트로폴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호텔에 갇혀 지내게 된 로스토프 백작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세계는 전 세계에서 메트로폴 호텔이 되었다. 얼마나 암담한 일인가. 여행은커녕 호텔 문 밖으로도 나갈 수가 없는데. 평생. 


하지만 이 소설은 결코 어둡거나 침울하지 않다. 로스토프 백작의 선택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멋'대로 자신이 세운 가치대로 살아나간다. 넓은 스위트룸에서 좁디좁은 객실로 쫓겨났지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몇 개와 책들을 챙겨 방을 채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자신의 일상을 만들어나간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계급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늘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며 그들과 격없는 친구로 지낸다. 길고양이 친구에게도 자리를 내어준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음식과 술에 있어서도 지식이 풍부하다. 항상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긴다. 몇 번의 고비를 겪기는 하지만 끝내 긍정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끈다.


약 30년에 걸친 로스토프 백작의 삶을 긴 시간 동안 읽으면서 나는 조금씩 용기를 얻었다.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멋진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는 것에 어쩌면 너무 많은 조건, 경험들이 필요치 않을지도 몰라.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결코 아주 많은 것들이 아닐지도. 로스토프 백작이 그곳에서 만든 우정, 사랑, 일, 추억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스토프 백작이 호텔 안에서 겪은 많은 것들은 그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아무리 온 세상을 돌아다닐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겪지 못했을 경험들이었다. 장소가, 조건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가짐, 생각,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환상적인 캐릭터라 현실감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나에게 방향성을 제시해준 인물이다. 로스토프 백작. 더불어 위로를 받았고 용기도 얻었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GO!를 외친다. 여태껏 용기 내지 못한 거라면 이제 한 번 내보렴!! 네가 가진 것들을 믿고 말이야. 하고 얘기해주는 것 같다. 물론 아니어도 괜찮지만!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같다. 여름과 겨울이 점점 거세지고 내가 좋아하는 봄과 가을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간다. 짧디짧은 가을을 느끼러 잠시 근처 산책을 좀 하고 와야겠다. 매년 돌아오는 가을이지만 지겹지가 않다. 늘 아름답고 늘 고맙다. 나에게 여유를 줘서, 충만함을 줘서, 설렘을 줘서. 또 이렇게 글을 쓰고 싶게 만들어줘서.










<모스크바의 신사>가 좀 더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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