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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Aug 31. 2018

가해자의 뒤늦은 후회

<미스플라이트>를 읽고



후회라는 말은 항상 늦다. 그래서 무섭다. 하지만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그 어떤 아주 잔인한 후회는. <미스플라이트>의 정근의 후회는 과연 그를 변화시킬까? 이제 막 시작된 그의 변화는 지속될까. 마지막 페이지에서 정근의 행동은 과연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글쎄, 나는 희망으로 보지 않았다. 여전히 절망적이라고 느꼈다. 정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혼란을 느꼈을 뿐. 


가해자들은 그렇다. 모른다. 피해자가 결국 죽으면서까지 말을 해야, 몸부림을 쳐야 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본인 때문에 죽을 정도로 힘들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제야 얘기한다. 말을 하지 그랬어. 말을. 수없이 많은 말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또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말들을 뿌연 먼지처럼 툭툭 털어내놓고는. 



<미스플라이트>는 그런 가해자의 뒤늦은 후회를 보여준다. 다른 이가 죽었을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딸이 죽고 나니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일단 거기까지다. 이 소설에서 정근의 변화는. 이제 막 알기 시작했다는 것. 유나의 죽음, 유나가 자신에게, 하필이면 자신에게 남긴 편지 한 장 덕분에.



이 소설이 거기서 끝맺음을 지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독자는 유나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편지를 통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알 수 있지만 딸이 죽은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는 정근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실마리만 찾고 소설이 끝이 난다. 나의 바람은 정근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유나의 남은 편지들마저 찾아낸 뒤 영훈과 손을 잡고 딸의 억울함을 위해 함께 싸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왠지 이 소설은 그런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결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정근의 다짐이 금세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이 그렇지 않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나의 괴로움이 담긴 편지들처럼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 세상에 숨어 있다. 괴로워도, 억울해도 꾹 참으며 살아가고 있다. 용기를 내어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유나처럼, 윤 대령처럼 고통받다가 사라지고 만다. 진짜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사건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나. 



피해를 입은 이가 꾹 참다가, 참고 또 참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세상에 외쳐본들 가해자가 떳떳한 결론이 너무 쉽게 지어지지 않나. 가해자가 그제야 '아, 제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하면 사과했잖아 하고 끝나지 않나. 피해자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어 본들 피해자 답지 않다는 더 큰 상처가 되돌아오지 않나. 내가 본 현실은 그랬다. 



딸이 죽었다. 그냥 나약해서 자살한 줄만 알았는데 자살의 원인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몰랐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알았던 것들이 흔들리면서. 그동안 감고 있었던 눈을 뜬 것처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늦었지만......



딸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자신이 가해자인 줄 모른 채 가해자로 살았을 정근. 많은 가해자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자신이 좋은 부모인 줄 알고, 좋은 선배인 줄 알고, 좋은 상사인 줄 알고, 좋은 배우자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해자들이 자신이 가해자인지 알게 해주려면 너무나도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그래도 유나가 남겨 놓은 편지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라도 남겨놓았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제발 누군가가 꼭 발견해줬으면. 그것을 꼭 정근이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그렇게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유나가 죽고 나니 모든 게 복잡해졌다. 
정근은 유나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이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빠, 아직도 몰라요?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윤 대령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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