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는 목소리
나는 소심한 아이였다. 반에서 반장도 하고, 회장도 하면서 늘 소리 높여 말하곤 하는 아이였지만 나는 알았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작게 소곤거리는 아이라는걸. 부모님께도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땡깡’이라는 것을 부려본 적이 없고 생일이나 어린이날을 기념해서 선물을 사주신다고,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해도 쭈뼛거리며 말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런 나는 매일 오후 TV에서 방영하는 <빨강 머리 앤>을 열심히 보았다.
앤은 나와는 다른 아이였다. 앤은 늘 누구 앞에서나 목소리가 컸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명확했고 그것을 얘기했다. 그로 인해 자신을 돌봐주는 마릴라 아줌마에게, 학교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결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 높고 큰 목소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말할 때 보여주는 밝은 표정 등이 어린 나에게는, 소심한 나에게는 새로운 에너지처럼 느껴졌다. 그 에너지를 얻고 나면 잠시 동안 나는 앤이 되었다. 밝고 당당하고 긍정적인, 계속 동동거리는 앤이.
나의 에너지가 가라앉을 때 나는 막연히 앤을 떠올렸다. 앤과 앤의 초록색 지붕의 집, 마릴라 아줌마, 매튜 아저씨, 다이애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라앉은 에너지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앤의 낭랑한 목소리, 원하는 것을 상상하는, 그 황홀해 하는 표정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었다. 마치 ‘이리 와 봐~오늘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어!’, ‘어때? 햇살이 무척 따듯하지 않니?’, ‘오늘의 바람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아.’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곤 했다.
무언가 망설여지는 순간에도,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잊고 방황할 때도 내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앤은 존재했다. 문학 속에, 영화 속에, 드라마 속에, 만화 속에도. 그 속에서 앤의 에너지를 느꼈고, 그래서 끌렸고 나는 움직였다.
어릴 때 나에게 앤은 커다랗고 따뜻한 빛 덩어리 같은 에너지였다면 지금의 나에겐 따스해 보이는 붉은 스탠드 불빛 같은 에너지다. 먼 곳으로 방황을 떠났다가도 그 따스한 조명 아래 ‘나’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인생은 고독하다는데 나에겐 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