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멜랑꼴리 한 기분, 오랜만이다. 다 증발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속에 촉촉한 그 무언가가 아직 습기를 머금고 있었나 보다.
이쯤이면 다 괜찮을 것 같아서 아직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아이디를 종종 SNS 검색창에 입력해 보곤 했었다. 내가 아는 그는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아도 계정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 같았다. 맞았다. 계정은 존재했다. 하지만 게시물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계정에서 그 어떤 게시물을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결혼사진, 아이들 사진 등등.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는 이미 내 안에서 다 녹아버렸으니까.
오늘 문득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랜만에 그의 아이디를 다시 검색.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의 계정에 새로운 게시물들이 보였다. 자필로 쓴 메모가 사진 속에 있었는데 그의 글씨였다. 단번에 알아보았다. 얼굴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 반가웠다. 잊고 있었던 얼굴도 갑자기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게시물은 1년 전쯤 작성한 것이었다. 다른 게시물들은 이웃만 볼 수 있는 것인지 비공개인지 모르겠다. 몇 개 안 되는 그의 게시물은 내가 알던 그를 그대로 보여줬다. 사진과 글씨와 짧은 글. 누가 쓴 건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을 걸까. 아니면 가족들과 관련된 게시물은 비공개인 걸까. 분위기로 봐서는 아직 혼자인 것 같기도 한데. 아무 쓸모없는 궁금증들. 돌아오지 않을 대답. 뭐, 상관없었다.
그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의 SNS 덕분에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과거의 연인이기 이전에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그를 통해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자주 혼났다. 생각이 없다고, 게으르다고, 답답하다고. 나에 대한 애정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어떨 때는 연인이라기보다 그의 학생이 된 것 같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수평 관계가 아니라 수직 관계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친한 오빠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생각도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기준에서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라면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나는 그의 충고들을 받아들이고 나아지려 노력했다. 그땐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는 갔다. 그의 표현 방식은 여전히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나에게 요구했던 것들은 지금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매우 비슷했으니까. 이미 나보다 두세 발짝 앞서 나가고 있던 그는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여전히 그는 나보다 앞서 있을까? 그때 내가 말한 대로 잘 지내고 있구나 칭찬을 해줄까? 이제 나를 동등한 관계로 인정해줄까? 그도 나에게 배운 것들이 있었을까? 그동안 묶어 놓았던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눌 일은 없겠지만 꿈에라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보다 어린 동생이 아니라, 그보다 부족한 인간이 아니라 나름대로 잘 성장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얘기 나눠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침을 튀기며 얘기해주고 싶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얘기들이 아니라 진짜 내 얘기들을 해주고 싶다.
나는 그의 문체, 그의 글을 좋아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데에도 그는 나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가 계정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종종 그의 글을 훔쳐보게 될 것 같다. 그가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다. 숨어서 조용히 그가 계속 글을 쓰기를 응원해야겠다. 그의 삶도 함께.